[한경과 맛있는 만남] 이왈종 화백 "욕망·불안, 붓끝에 녹여 中道 정신 담아내지"

입력 2013-09-26 17:08
수정 2013-09-26 21:16
이왈종 화백

교수 그만두고 타향살이 24년…들꽃에 취하고 새 노랫소리에 감흥
'왈종미술관' 설립해 아이들 교육

미술품 거래 활성화시키면 경쟁력 있는 예술가 탄생해 국격 높아지고 관광객 증가할 것


"1989년이었어요. 그때 추계예술대에서 학과장을 맡고 있었는데 사회가 하도 혼란스럽고 수업도 잘 안 되고 해서 총장실로 달려가 대뜸 안식년 휴가를 달라고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총장은 헛웃음만 터뜨리더군요. 그렇게 서울을 떠났습니다. 어느덧 제주 생활이 24년째로 접어들었군요."


한국화가 이왈종 씨(68)는 “처음엔 그림이나 실컷 그리다 돌아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제주가 좋아져서 2001년엔 아예 사직서를 냈고 제주 사람으로 눌러앉았다”고 했다. 그는 이곳에서 수많은 시간을 캔버스와 함께 씨름하며 한국 화단의 최고 인기 작가로 우뚝 섰다.

전시 때마다 이 화백의 작품은 거의 매진됐다. 국내 유명 골프장에도 그의 그림은 꼭 한두 점 걸려 있다. 지난 5월에는 제주에서도 절경으로 손꼽히는 서귀포시 정방폭포 인근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왈종미술관’을 열었다. 혈혈단신으로 제주를 찾아갔던 배짱과 무색무취한 ‘중도(中道)의 정신’, 고집스러운 ‘쟁이 근성’이 성공 비결이었다.

○화폭에 옮긴 중도의 정신

건장한 체격에 서글서글한 외모. 육식을 즐길 것 같은 이 화백이 소개한 곳은 의외로 향토색이 물씬 풍기는 서귀포 바닷가 식당 ‘맷돌뚝배기’였다. “평소엔 육식을 잘 안 해요. 여긴 친구들과 골프를 친 후 술 한 잔 생각날 때 옵니다.”

맷돌뚝배기집의 별미는 고등어와 제주 옥돔을 숯불에 구운 요리였다. 막걸리를 담은 양은 주전자에는 그의 춘화 작품이 그려져 있었다.

이 화백은 “제주도에서 많은 걸 배우고 느꼈다”고 말했다. 중앙 화단에서 활동하지 않아도 그림이 잘 팔리는 걸 보면서 뿌듯한 마음도 든다고 했다. “이곳에 살면서 동백꽃 수선화 매화 귤꽃 엉겅퀴 등 들꽃에 취했습니다. 비둘기 동박새 참새 꿩 까치 직박구리 비취새들이 마당에서 목을 축이고 첨벙대며 목욕하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했지요. 새와 풀벌레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이곳이 천국처럼 느껴집니다. 꿈속에서 사는 듯했어요.”

이 화백은 고등어구이에 입맛을 다시며 자신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중도의 미학 세계를 이야기했다. “제가 젊은 시절 불교에 심취했어요. 관련 책도 많이 읽었고요.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글귀가 가장 와 닿아서 이것을 평생 화제로 삼았죠.”

그는 중도의 의미에 대해 “존재하는 것은 꿈이요, 환상이요, 물거품이며 또한 그림자와 같다”며 “선과 악, 사랑과 증오 등 온갖 갈등에서 벗어나 평상심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이 곧 중도”라고 설명했다. 초창기 연기(緣起)를 테마로 작품 활동을 펼친 이 화백은 1980년대 중반부터 작품의 주제를 ‘생활의 중도’로 전환했고, 제주에 머물면서는 ‘제주 생활의 중도’로 바꿨다.

그에게 예술은 그림에 역사의식과 시대성, 영원성을 투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인간이 하는 예술의 영역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작품은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완벽함에 좀 더 가까이 가려고 노력할 뿐이죠. 좋은 작품은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닙니다. 축구선수가 공을 잡아도 매번 골을 넣지 못하는 이치와 같은 거죠.” 작가는 가능성을 가지고 부단히 노력할 뿐이라는 얘기다.

○핸디 80대 초반의 골프광

두부돼지고기볶음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켠 이 화백은 골프로 화제를 돌렸다. 때마침 TV에서는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이스트레이크골프장에서 열린 PGA투어 플레이오프 최종전 투어 챔피언십에서 헨리크 스텐손이 우승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는 핸디캡 80대 초중반 실력의 골프광이다. 이 화백의 그림에도 골프가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왜 하필 그림에 골프를 소재로 활용하는지 물었다. 그는 “자연과 하나가 돼 집착을 버리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무심(無心)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내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세계관인데 골프에는 인간의 쾌락과 고통, 사랑과 증오, 좋고 나쁜 분별심 등의 양면성을 융합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괜한 욕심을 부리면 공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갑니다. 무리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화내지 않고, 자만하지 않고, 동반자들과 융화하며 마음을 비울 때만 말을 들어요. 골프는 심판이 없는 ‘중도의 스포츠’잖아요. 플레이어 스스로가 심판으로서 결정하고 처리해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과도 닮았습니다.”

그가 골프를 처음 접한 것은 1998년. 김홍주 전 제주 핀크스골프장 대표의 권유로 입문했다. 골프를 배운 지 3개월 만에 그곳에서 ‘머리’를 얹었다. ‘내기’를 세게 하다 낭패를 본 적도 있다는 이 화백은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골프 회화’를 시작했다.

“골프를 치는 데 하루가 꼬박 걸리더군요. 골프를 치면서 먹고살 게 없는가를 고민하다 생각한 것이 골프 그림입니다. 골프와 인생을 같은 맥락에 놓고 대비하기도 좋아합니다. 인생이나 골프나 잘 되는 날도 있고, 안 되는 날도 있잖아요.”

이 화백의 작품은 무법이 필법처럼 거침없이 공간을 가르며 절제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어떤 구속도 없이 고요한 인간의 마음과 정서를 필드에 펼치는 것이다. 밑그림도 없이 단숨에 그린 작품들에 중도 철학이 잘 배어 있다.

“서귀포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작업실에서 매일 10시간 이상 정신없이 빨려드는 기분으로 청명한 햇살과 바람, 파도를 애인처럼 끼고 중도 세계를 색칠했죠. 그림도 골프와 닮았습니다. 흥분과 즐거움이 있고 또 끝난 뒤의 허전함도 있지요.”

○사비 털어 만든 ‘왈종미술관’

제주산 옥돔이 상에서 사라질 즈음 그가 주인을 불렀다. “여기 제주 옥돔 한 마리 더 줘요.” 숯불에 바싹 구운 옥돔 맛은 일품이었다. 이 화백은 “다른 건 안 먹어도 이 집에 오면 옥돔을 2~3마리 먹고 간다”고 했다.

옥돔 얘기 끝에 지난 5월 개관한 왈종미술관 얘기가 이어졌다. 이 화백의 고향은 경기 화성이다. 그러나 지난 10여년 동안 제주에서 6~10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그림 수업을 하면서 그는 미술교육뿐만 아니라 인성교육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인사예절을 가르치고, 함께 동요를 부르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아이들이 밝고 씩씩하게 크는 변화를 지켜보고 싶어 미술관을 짓기로 한 것이다.

정방폭포 인근의 미술관은 전체 면적 992㎡에 3층 규모다. 겉에서 보면 찻잔 모양을 닮았다.

이 화백은 최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는 자신의 인생철학을 실천하는 데 부쩍 관심을 쏟고 있다. “불우이웃을 돕는 게 남은 생의 목표입니다. 미술관 1층 바닥에 ‘일체유심조 심외무법(一切唯心造 心外無法·모든 게 마음에 달려 있고, 마음이 곧 법이다)’라고 쓴 것도 욕심을 버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잘해보자는 의미입니다.”

그는 2011년에는 사회공헌을 위해 재단법인 왈종후연미술문화재단을 설립, 현재 왈종미술관에 전시된 작품 90여점을 비롯해 소장품 380여점을 기증했다. 작년에는 한경갤러리에서 판화전을 열어 전시회 수익금 3000만원을 유니세프에 기부했고, 올해는 다문화가정을 돕기 위한 전시회를 진행하고 있다.

○고급문화 살려야 국가 발전 도움

그는 해물뚝배기 국물을 안주 삼아 막걸리 두 잔을 거푸 마시더니 지난 6년간 삼성그룹을 비롯해 저축은행, 오리온그룹, CJ 일가 등의 미술품 컬렉션에 대한 검찰 조사에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컬렉터가 그림을 사겠습니까. 불황이 이어지는 미술 시장에 찬물을 끼얹지나 말아야죠. 저는 지역의 작가들 작품도 사주고 있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술품 거래가 활성화되는 것을 어느 한 잣대로만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한국에서도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예술가가 나와야 합니다. 문화가 발전해야 국가 경쟁력도 생기고 발전하죠.”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도 공존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고급문화를 누리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결국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다른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을 보러 해외로 가야 하는지요. 한국에 보러 오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야기꽃이 한창 필 무렵, 해물뚝배기집의 또 다른 자랑인 성게미역국이 올라왔다. 푸릇푸릇한 미역과 성게의 향이 함께 피어 올랐다. 갓 건진 미역의 쫄깃쫄깃한 식감이 고스란히 살아났다. 그와 나눈 이야기들도 이 집 특유의 해물뚝배기와 성게미역국을 닮았다.



이왈종 화백의 단골집 제주 서귀포‘멧돌뚝배기’ 짭짤한 옥돔구이·김치두루치기 으뜸

멧돌뚝배기는 제주 화도 출신인 강두남 씨(60)가 16년 전 정방폭포 근처 칠십리해안도로에 문을 연 토속 음식점이다. 제주 앞바다에서 잡은 신선한 해산물로 만든 옥돔구이, 고등어구이, 전복 해물뚝배기, 전복죽, 갈치조림과 구이, 성게국 등 다양한 제주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숯불에 구운 옥돔구이는 짭짤하게 간이 밴 것이 부드럽고 담백하다. 제주산 돼지로 만든 김치두루치기(사전 예약 가능) 역시 쫄깃한 육질이 일품이다. 성게미역국은 기름을 넣지 않고 소금으로만 간을 해 맛이 깔끔하고, 미역과 성게 알이 어우러져 제주 바다 향이 그대로 입으로 전해진다. 전복을 넣어 끓인 해물뚝배기는 된장으로 맛을 내 구수함이 더하고 갈치조림과 구이는 멧돌뚝배기집 특유의 감칠맛이 난다. 옥돔구이 3만원, 전복뚝배기 1만3000원, 전복죽 1만2000원, 성게미역국 1만원, 갈치조림(2인 기준) 3만5000원. (064)762-3368

서귀포=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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