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도 아팠고, 어제도 아팠는데, 엄마, 오늘밤에도 아플 거야?"
추석을 보낸 뒤 수요일 아침, 아이는 아침상에 앉아 아빠와 식사를 하다 말고 문득 묻는다. 추석 연휴를 정신없이 보낸 뒤 월요일 출근하자마자 위장에 탈이 나, 시든 나물처럼 늘어져있는 제 엄마가 걱정스러웠나보다. 미안한 마음에 앞서 너털웃음부터 나왔다. 제법 말하는 본새가, 어린이티가 났기 때문이다. 슬쩍 눈을 치켜뜨고, '난 생각이 깊은 어린이야'라고 자부하듯, 또박또박 어른 말투를 흉내내어 이야기를 건네는 모습에, '어느새 아이가 이렇게 자랐나' 놀랍기만 했다.
사실, 지난 3월부터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놓고도 등하교길 한 번 제대로 챙겨본 적 없는, '무심하고 바쁜' 엄마였다. 알림장을 통해 요즘 지오가 준우라는 친구와 부쩍 친해져 서로 찾고는 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그 아이와 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확인한 적이 없었던 셈이다.
"오늘도 준우 만났어? 뭐 하고 놀았어?"
퇴근 후 지오를 만나면, 나 역시 어린시절 엄마에게 들었다면 신경질깨나 냈을 법한, '영혼없는' 질문들이나 던지고 말 뿐이었다. 어쩌다 '어머니 교육'을 받으러 간 어린이집에서 "지오가 준우랑 이야기를 많이 해요. 책도 같이 보고, 화장실도 함께 가고, 서로 늘 찾아요"라는 선생님 말씀을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아침마다 어린이집에 가는 것을 즐거워하게 되었던 것 같다. 친구 덕분이었나?
이번 추석 연휴 내려간 시댁에서, 아이가 친구와 지내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다름아닌 사촌누나. 4개월 먼저 태어난 은혜와 깔깔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 아닌가. 지난 설에 본 뒤 처음 만나, 은혜를 기억이나 하려나, 싶었지만 죽마고우처럼 꼭 붙어서, 밥도 안 먹고 같이 자동차도 타고, 숫자놀이도 하고, 놀이터에도 나갔다. 바쁜 엄마와 잠시라도 함께 있게 되면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 했던 모습도 온데간데 없었다.
'아, 아이가 저렇게, 제 또래와는 놀 줄 알게 되었구나!'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느새 또래 집단과 교류를 할 줄 알게 되었다니. 서울에서는 자주 만나는 여동생네 아이들과는 쑥스러워하고 대화가 많지 않아, 아직도 아기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종사촌들은 알고보니 (두 살) 형, (다섯 살) 누나이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동갑에 가까운 또래를 만나자 금세 친해진 것이다. 대견하기도 하고, 묘한 질투심(?)도 발동했다. 결국, 아이를 시험에 빠뜨리는 질문을 해 댔다.
"지오야? 넌 은혜 누나가 그렇게 좋니? 은혜 누나가 좋아? 엄마가 좋아?"
아이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엄마"라고 하더니 "나는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라고 의젓하게 말하는 것 아닌가.
"(음, 이것이! 팬 관리를 하는구만!) 그래~엄마도 지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행복해~!"
"(어머, 내가 했던 말들을 되풀이 하네!)엄마두 지오랑 같이 있으니까 좋다."
"그래? 혼자 있으면 심심한데~그지~"
혼자 있어서 심심하다는 말은 한 적이 없던 것 같은데. 혼자라서 외롭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순간적으로 생각이 복잡해진다. 어쨌든, 함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은 좋은 거니까.
교통 상황으로 고려해, 새벽에 출발하려다, 전날 밤에 시댁에서 올라오게 되었다. 날짜를 어기면 큰 일 나는 줄 아는 지오는 왜 하루 빨리 가는지 의아한 눈빛이었고, 은혜와 헤어지기도 싫어 보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울고 보채지는 않고, 이내 툭툭 털고 일어나 현관까지 마중을 나온 은혜와 기념촬영(?)을 하더니, 은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또 보자아아아~. 집에서 있어어어~."
친구-물론 은혜는 친구가 아니라 사촌이지만-와 만나서 신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지만, 헤어질 시간이 있음을 알고 받아들일 줄 아는 것 같았다. 친구랑 놀 때는 잠시 뒷전이지만, 어쨌든 첫 자리를 차지하는 부모님과 함께 길을 나서는 지오. 어느새 또래와 관계를 형성해갈 줄 알게 된 지오를 보며, 금세 자라 여행도 부모님이 아닌 친구와 가겠다고 할 날이 올 것만 같아 괜시리 울적해졌다.
이재원 < 텐아시아 편집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