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타 신화 이끈 '경영의 匠人' 떠나다

입력 2013-09-17 22:23
수정 2013-09-17 23:19
도요다 에이지 前 회장 타계…향년 100세

'저스트 인 타임' '가이젠' 도입…제조업에 큰 획
"CEO가 손에 기름때 묻히는 건 당연" 현장 강조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중흥을 이끈 도요다 에이지(사진) 최고고문이 17일 사망했다고 일본 매체들이 보도했다. 향년 100세.

도요다 최고고문은 이날 오전 4시32분께 아이치현 도요타시의 한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도요타자동차의 창업자인 도요다 사키치(1867~1930)의 조카인 그는 도쿄제국대(현 도쿄대) 공학부를 졸업한 뒤 1936년 현 도요타자동직기의 전신인 도요타자동방직기제작소에 입사했고 이듬해 분리독립한 도요타자동차공업(현 도요타자동차)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학 졸업논문은 자동차용 디젤엔진의 설계도였다.

그는 기술담당 부사장을 거쳐 사장(1967~1982), 회장(1982~1992), 명예회장(1992~1999) 등을 거치며 도요타자동차를 세계적 기업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67년 도요타자동차의 5대 사장에 취임한 그는 원가 절감과 생산성 제고를 위한 도요타의 독자적 생산방식인 ‘저스트 인 타임(JIT)’을 확립했다. 재고를 없애 비용을 최소화하고 부품이 필요할 때마다 납품업체로부터 공급받는 이 시스템은 전 세계 대부분의 자동차 업체들과 수많은 제조업체들이 사용하고 있다.

이후 ‘코롤라’ ‘크라운’ 등 도요타 대표 브랜드를 줄줄이 개발하며 일본의 승용차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스포츠카와 소형차 등을 잇달아 출시해 승용차 부문의 ‘풀라인(모든 종류의 상품을 취급하는 것)’ 체제를 구축했다. 오일쇼크 당시에는 한발 빠른 감산 체제를 구축해 위기를 넘기는 등 도요타를 이끄는 동안 발군의 경영감각을 발휘했다. 미·일 자동차 무역 마찰이 심화된 1983년에는 제너럴모터스(GM)와 합작사를 설립해 미국 생산 시대를 열기도 했다.

그는 “최고경영자가 손에 기름때를 묻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며 생산 현장을 떠나지 않는 치열한 현장주의로 유명했다. 현장을 떠나 요양생활을 하던 최근까지도 최고고문으로서 회사 간부들의 상담에 응하는 등 그룹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며 직원과 소비자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아왔다. 그는 별명이 ‘카 가이(car guy)’였을 만큼 열정적으로 자동차를 사랑했다.

또한 “마른수건일지라도 지혜를 짜내면 물이 나온다”는 말을 통해 임직원들에게 개선(가이젠·改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반세기 가까이 도요타를 이끌었지만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게 일본 자동차 업계의 평가다. 자신이 생각한 것을 부하들에게 절대로 강요하지 않는 것이 도요다 리더십의 특징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기업을 유도하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 정부가 주는 최고 훈장을 받고 1994년에는 혼다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의 뒤를 이어 일본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미국자동차전당’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헨리 포드가 자동차 산업시대의 막을 연 이후 업계의 20세기 후반을 빛낸 주역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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