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동서락을 가다
최선경 지음│옥당│320쪽│1만6500원
조선시대 남장 여인 여행기…제천 의림지·관동팔경 등 유람
추사 김정희도 인정한 명필
“금방 집안 아이들로부터 금원의 제문(祭文)을 얻어 읽어보니, 그 문장이 정(情)에서 나온 것인지, 문장에서 정이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중에도 글의 기운이 편안하고 구성이 반듯하며, (…) 여사(女士)의 요조한 품격만 있어, 제가 곧장 부끄러워 죽고만 싶을 뿐입니다.”
이는 추사 김정희가 쓴 글이다. 금원(錦園·1817~?)이란 인물이 누구기에 그가 부끄러움을 느낀 걸까. 유교문화가 지배하고 있던 조선시대 여성에게 선비(士)라는 호칭을 붙일 정도라면 여자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정받은 것이 틀림없다. 더구나 금원은 기생 출신으로 양반의 첩으로 들어간 여인이었다. 《호동서락을 가다》는 이 금원이라는 여인이 조선 강산을 여행하며 남긴 기록 ‘호동서락기’를 좇아 당시 풍경과 생활, 사회상을 현대적 관점으로 들여다본 책이다. 금원이 남장을 하고 처음 혼자 여행을 떠난 것은 불과 열네 살 때였지만, 여성으로서의 관점과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는 기개가 담겨 있다. 저자는 금원의 여행기간을 30~40일로 추정한다.
“이미 마음을 정하고 부모님께 여러 번 간절히 청하니, 오랜 후에 이를 허락하셨다. 이에 가슴 속이 후련해지면서 마치 천리마가 재갈에서 벗어나 곧 천 리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금원은 제천 의림지, 단양 삼선암과 사인암, 영춘 금굴과 남굴, 청풍 옥순봉 등 충청도 4군(四郡)의 명승지를 둘러보고 금강산으로 향한다. 당시 조선 사회에는 금강산 기행 ‘열풍’이 불고 있었다. ‘정조실록’에는 ‘제주 기생 김만덕이 굶주리는 백성을 구했다는 보고를 받고 상을 주려고 하자, 만덕은 사양하면서 금강산을 유람하기를 원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금원도 절벽 위에서 기둥 하나에 의지해 버티고 있는 보덕암과 동양 최대 마애불 묘길상 등 금강산을 꼼꼼히 둘러본 후의 감격과 자신감을 시로 남겼다.
‘모든 물 동쪽으로 흘러드니/깊고 넓어 아득히 끝이 없어라./이제 알겠노라! 하늘과 땅이 크다 해도/내 한 가슴 속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을.’
금원은 이어 관동팔경과 설악산을 둘러보고 한양으로 향한다. 그가 적어놓은 한양의 첫인상이 흥미롭다. 강원도 출신의 그에게는 도읍지다운 모습이었을까.
“한강은 허리띠처럼 한양을 두르고 삼강(三江·용산강 마포강 노량진)은 성시(城市)의 문이 되었다. 배와 수레가 모여들어 수산물, 육지 산물 등 물산이 풍성하고 기세가 웅장하니 아아, 훌륭하구나.”
열네 살 때 떠났던 여행기가 책의 1부라면 2부는 의주부윤을 지낸 양반 김덕희의 소실로 들어간 이후 금원의 생을 담고 있다. 김덕희가 의주 부윤으로 부임하는 길에 동행한 여행기, 용산 삼호정에서 여인들끼리 시 모임을 꾸리며 나눴던 자매애 등이다. 남자 못지않은 삶을 산 금원은 자신의 생을 돌아보며 ‘호동서락기’를 쓴 이유를 적었다. 죽어서 이름을 남기길 원했던 그는 아마 최초의 신여성이 아니었을까.
“평생을 돌이켜보니 맑은 곳에서 놀고 기괴한 곳을 돌아다녔으니 남자가 할 수 없는 것을 했다고 여겨진다.
생각건대 지나간 일과 경관은 눈 깜짝하는 한순간의 꿈이니, 진실로 글로 전하지 않으면 누가 지금의 금원을 알겠는가!”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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