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는 종교의 시대였다. 폐쇄적인 중세 사회를 반영이라도 하듯 당시의 건축물들은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축조됐다. 하지만 이러한 유행은 오래도록 지속되지 못했다. 전 유럽의 새로운 유행을 선도할 고딕 양식이 등장한 것이었다. 미술사학자 곰브리치는 고딕 양식의 우수한 미적가치를 ‘물질세계를 초월하는 별세계를 나타내는 듯하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러한 고딕 양식의 시작을 알리는 건축물이 바로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이다. 고딕 양식은 넓은 스테인드글라스 창과 뾰족한 첨탑 등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는 곧 전 유럽으로 확산됐다. 당시 중세도시의 구성원은 대부분이 자유 시민으로서 자긍심이 높았고, 이는 심미적이고 문화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즉, 샤르트르 대성당은 미술사적 측면에서 새로운 양식의 시작을 알릴 뿐만 아니라 문화적 측면에서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는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살펴 본 유럽 역사 속 샤르트르 대성당은 식량의 초과공급이 가져다 준 선물이자 재앙의 씨앗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듯하다. 초과공급이란 공급량이 수요량을 초과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처럼 수요량과 공급량이 일치하지 않게 되면, 시장 메커니즘이 작동해 수요량과 공급량이 일치하는 수준으로 조정된다. 이는 중세시기 샤르트르 대성당의 건립 전후의 상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로마제국 멸망 이후 유럽은 암흑시대였다. 수 세기 동안 대규모 농장과 풍부한 식량창고, 광활한 제국의 군대 연결망은 유럽인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었지만, 로마의 붕괴로 이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유럽 인구의 절반이 줄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상황이 어느 정도로 심각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시기 유럽의 희망은 마르세유의 한 수도원에서 시작됐다. 마르세유는 산악지대가 많아 풍부한 농산물의 생산을 기대할 수 없어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지역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암흑시대 유럽의 농업은 이같이 척박했던 마르세유 지역에서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잉여농작물 식량 교역의 시작점
그 중심은 마르세유의 베네딕트 수도원이었다. 이 수도원에서는 금욕적인 규율 대신 농업을 강조하는 독특한 규율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산이 많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기름진 땅을 찾아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 지속적인 수사들의 노력 덕분에 생활하기에 충분한 양의 식량을 얻을 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잉여 농산물마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수도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신분 고하를 떠나 굶주리는 사람들은 모두 수사가 되고자 찾아왔다. 뿐만 아니라 베네딕트 수도원의 규율은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가 많은 수도원이 농사를 중시하며 땅을 갈고 숲을 개간해 농작물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수사들을 중심으로 유럽 변방에서 시작된 농업이 점차 유럽의 중심부로 확장돼 황무지들을 경작지로 바꿔 놓았다. 끔찍했던 굶주림의 시대에서 벗어나 식량의 초과공급 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잉여농작물로 인해 식량의 초과공급이 발생하자 나타난 문제점은 식량의 저장이었다. 당시는 저장기술이 낙후해 많은 양을 재배해도 금세 상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식량 교역의 시작점이 됐다. 하지만 당시의 운송수단은 속도가 느린 배나 우마차가 대부분이어서 장거리 교역이 거의 불가능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수사들이 고안해낸 것이 바로 맥주였다. 당시에 생산되는 주요 농작물은 보리였는데, 부패를 늦추기 위해 홉을 활용한 맥주의 형태로 주조해 저장과 장거리 교역의 어려움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이후 교역규모는 빠른 속도로 커졌다. 이미 농업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위치한 다른 수도원들과의 연결망이 풍부했기 때문에 장거리 교역의 문제가 해결되자 식품 교역이 급속도로 발달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유럽지역은 경제적으로 부활하기 시작했다. 먹을거리가 생기자 아기를 더 많이 낳게 되고, 이를 통해 산업전반의 노동력이 풍부해졌다. 암흑시기에 절반으로 감소했던 인구가 600년 만에 약 6배가량 증가하게 된 것이다. 풍부해진 노동력은 더 많은 농산물의 생산과 교역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곧 유럽 전체의 번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이 시기에 지어졌다. 뾰족한 첨탑과 기존의 양식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엄청난 크기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암흑시기를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한 자부심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실크로드 따라 전염병 퍼져…
하지만 자연은 계속되는 개간과 증가하는 식량의 생산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웠다. 농업을 위해 숲을 개간하고 밭을 가는 일은 자연 상태의 땅의 힘을 고갈시키고 토양의 침식을 가져왔다. 즉, 자연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선 생산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자연의 힘은 무서웠다. 14세기 초, 유럽 전역에 불어 닥친 태풍은 이뤄놓은 많은 것을 무너뜨렸다. 들판의 농작물들은 넘어지고, 제방의 붕괴로 인해 유입된 바닷물로 토지는 병들었다. 다시 굶주림은 시작됐고, 풍요를 맛본 이후의 기근은 곧바로 약탈과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정부에 대한 폭동으로 변질돼 피해가 커졌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대홍수와 함께 전염병이 시작된 것이었다. 전염병의 원인은 다름 아닌 암흑시기를 극복한 원동력이었던 식량의 초과공급에 있었다. 잉여 생산물의 존재는 국내뿐 아니라 실크로드를 통한 동방과의 활발한 교역을 가능하게 했다. 그중에서도 유럽인의 미각을 사로잡은 동방의 물품은 향신료였다. 향신료를 구하기 위한 식량교역량은 갈수록 늘어났고 이는 세관 검역의 부실로 이어져 결국 페스트 박테리아가 유럽으로 들어올 수 있는 틈새가 벌어지게 됐다. 전염병은 대홍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과거와 달리 큰 도시를 중심으로 교역로가 발달하였기 때문에 페스트균 역시 이를 따라 이동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인구는 다시 급감하게 됐다.
수요·공급 균형 찾는 과정
수요와 공급의 조정 작용은 시간이 지나자 점자 안정됐다. 자연재해와 전염병으로 많은 경작지는 휴경지가 돼 식량 공급은 급감했지만, 동시에 이를 수요할 인구도 엄청나게 감소해 줄어든 식량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수요와 공급이 평형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식량 공급 및 인구의 감소로 균형이 형성돼 식량의 부족이 문제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애써 산과 골짜기까지 찾아다니며 경작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사람들의 선호도 많은 노동력을 투입해 산출물을 얻는 농사보다는 비교적 적은 노동력이 필요한 동물사육으로 옮겨갔다. 많은 농경지는 가축사육지로 변모해나갔다. 식량수요와 공급의 변동은 샤르트르 대성당이 건립부터 유럽인들의 선호변화까지 삶의 방식 전반에 영향을 미친 셈이다.
14세기 대홍수와 페스트는 유럽인구의 절반 가까이 감소시켰다. 또한 그 이전, 마르세유를 중심으로 시작된 농업의 발달과 식료품의 활발한 교역은 유럽인들의 자부심을 표현하는 샤르트르 대성당을 세울 수 있었지만, 동시에 어렵게 이뤄놓은 세계를 파멸할 재앙의 씨앗을 뿌려왔던 것이다. 현대의 경제상황도 분명 식량의 수요와 공급이 변동하고 이를 조정하는 과정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기술의 발달로 중세와 같은 극단적인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농업경시 풍조가 만연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세계의 인구가 갈수록 증가하고, 경작지는 계속해서 부족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약 700년 전 유럽의 모습을 통해 한 번쯤은 되돌아봐야 할지도 모른다.
김동영 KDI 연구원 kimdy@kdi.re.kr
경제 용어 풀이
▨ 수요와 공급(demand and supply)
수요는 경제주체가 상품을 구입하고자 하는 욕구를 의미하며, 공급은 상품을 판매하고자 하는 의도를 의미한다. 한편, 구매자가 시장가격으로 구입하고자 하는 상품의 양이 공급량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를 초과공급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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