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 신청 디트로이트를 가다
노숙자 거리 활보…경찰 부르면 출동하는데 1시간
일부 주민 "차라리 잘된 일…과거 잊고 새출발해야"
제조업 기반 탄탄…젊은 창업자 몰려든 건 희소식
디트로이트시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미국의 다른 대도시라면 직장인들로 붐빌 평일 점심시간이지만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시내 중심가는 텅 비어 있었다. 맥도날드, 서브웨이 등 전국 체인을 제외하곤 상점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골목의 신호등은 노란불만 깜빡거렸고 그나마 신호등이 작동하는 큰 길에서도 노숙자들이 신호를 무시한 채 길을 건넜다. 어차피 지나다니는 차도 별로 없었다. ‘자동차의 도시(Motown)’라는 별칭이 무색할 정도였다.
제대로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건물은 제너럴모터스(GM) 본사 건물뿐. 기능이 마비된 유령도시에 홀로 우뚝 선 모습이 기괴한 기운마저 풍겼다. 거리에서 어렵게 만난 직장인들은 시의 파산에 대해 묻자 “나는 시에 살지 않는다”며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중산층은 모두 교외로 빠져나갔다’는 말이 실감났다. 디트로이트에 이틀을 머무는 동안 경찰관이나 경찰차를 본 건 단 한 번뿐. ‘디트로이트에서 경찰을 부르면 출동하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는 소문이 과장은 아닌 듯했다.
○“파산은 오히려 잘된 일”
디트로이트의 비극은 역설적이게도 도시가 가장 호황을 누렸던 20세기 초에 시작됐다. 자동차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180만명의 인구를 수용해야 했던 디트로이트는 시의 면적을 계속 늘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50년대 이후 강성노조와 해외 자동차 업체에 밀려 산업이 쇠퇴했고 인구는 70만명으로 줄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지역은 빈민촌으로 변했다. 자연히 범죄율이 치솟았다. 세수가 줄어든 시 정부는 더 이상 이런 지역들을 관리할 능력이 없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과도한 복지를 약속했다. 시 예산의 38%가 은퇴 공무원의 연금을 지급하는 데 쓰이는 이유다. 치안, 도로정비 등 기본적인 서비스는 예산집행의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그런데도 시 정부는 인프라를 확충한다며 무리하게 돈을 빌렸고, 결국 눈덩이처럼 늘어난 빚(185억달러)을 갚지 못해 지난달 18일 파산보호(챕터9)를 신청했다.
60여년 디트로이트의 쇠퇴를 지켜본 인근 주민들은 차라리 시의 파산 신청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포드 본사가 있는 디어본시에서 만난 제이슨 메이스는 “악성 부채를 벗어던지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라며 “정치인들이 드디어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포드 마케팅 매니저로 자신을 소개했다.
○“은퇴자들이 가장 두려운 건 불확실한 미래”
반면 디트로이트대 연구실에서 만난 이사야 매키논 교수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디트로이트 경찰청장을 지낸 그는 “1년에 9만5000달러를 연금으로 받아 수령액이 조금 줄어도 걱정이 없다”면서도 “1년에 2만5000달러를 받는 동료들의 삶은 크게 흔들릴 것”이라고 말했다.
매키논 교수는 “경찰 학교에 입학한 1965년 최종 직위에 따라 연금을 지급받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처음 들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 교관에게 ‘만약 시가 파산한다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던 일도 떠올렸다. 그러자 교관은 ‘그런 일은 절대 없다’고 잘라 말했다고. 1998년 55세의 나이로 은퇴를 하면서 그는 연금 관계자로부터 ‘110세가 될 때까지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매키논 교수는 “그때는 110세까지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지 시가 파산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공무원들이 과잉 복지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술 취한 여자로부터 칼에 찔린 것”이라며 목 뒤 상처를 보여줬다. “이런 상처가 몸에 아홉 군데나 있다”고 했다. 생명을 담보로 약속받은 연금이라는 얘기다. 다만 그는 시가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한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매키논 교수는 “새로운 현실에 맞춰 희생을 해야 한다는 건 우리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은퇴한 동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불확실성”이라고 전했다. 연금이 얼마나 깎일지, 건강보험 혜택은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기 때문이다.
○폐허 속에서도 기업가 정신은 싹튼다
디트로이트에 절망적인 소식만 있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젊은 창업가들이 도시로 몰려들고 있는 건 희소식이다. 디트로이트가 속한 미시간주에는 다행히 미시간대, 미시간주립대 등 세계적인 대학이 많다. 올가 스텔라 디트로이트 경제성장공사 부사장은 “뉴욕 등 다른 도시에 비해 임대료가 훨씬 싼 데다 제조업 기반이 여전히 탄탄하기 때문에 대학 졸업 후 디트로이트에 남겠다는 청년 사업가들이 많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은 시의 파산이나 연금에는 관심이 없는 모습이다. 2년 전 디트로이트에 설립된 시계 제조회사 시놀라의 자크 패니스 대표는 “디트로이트에는 일자리를 절실히 원하는 우수한 인재가 많고 제조 기술도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시놀라는 현재 100여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디트로이트에서 4대째 부동산 일을 한다는 랜들 북 콜리어스인터내셔널 부회장은 “모기지업체인 퀴큰론스의 댄 길버트 회장은 최근 디트로이트에서 빌딩 22개를 사들였고 지난주 뉴욕에서 온 한 투자자는 한꺼번에 건물 세 채를 사서 돌아갔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파산은 새로운 출발”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디트로이트의 턴어라운드를 예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디트로이트=유창재 특파원 yoocoo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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