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살인자들의 기억법' 출간 김영하 씨
“내가 아는 한 이런 소설은 쓰인 적이 없다.”
1년 반 만에 신작 장편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을 낸 소설가 김영하 씨(사진)의 자평이다. 24일 만난 김씨는 “소설을 내면서 여러 가지 걱정도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리라는 점”이라고 했다.
확실히 이 소설은 낯설다. 알츠하이머(치매)에 걸린 왕년의 연쇄살인범이라는 소재는 신선하고, 기억을 잃어가는 인간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형식은 파격적이다. 소설은 150쪽 정도로 짧고 여백도 많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활자는 주인공이 기억하기 위해 붙인 메모이고, 여백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뇌에 생긴 구멍과 같다. 언뜻 과하다 싶은 여백은 작가가 치밀하게 계산해 만든 주인공의 세계다.
25년 전에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70세의 연쇄살인범 김병수는 점점 기억을 잃어간다. 살인자로서의 자아를 잃지 않으려는 그는 메모와 녹음을 통해 기억과 인생을 지키려 애쓴다. 타인의 삶을 아무렇지 않게 앗아간 그가 이런 방식으로 삶을 지키려고 하는 건 역설적이다.
김병수 주위에는 세 인물이 있다. 과거에 그가 저지른 살인을 추적하는 안 형사, 마을에 나타난 또 다른 살인마 박주태, 그의 딸 은희다. 어느날 은희는 그가 살인마라고 확신하는 박주태를 결혼할 사람이라며 소개하고, 딸을 지키기 위해 그는 마지막 살인을 계획한다. 하지만 김병수의 기억은 점점 엉키고 사라져만 간다. 엇갈리는 기억과 함께 작품의 스토리 전체도 미궁 속으로 빠진다.
작가는 “카인과 아벨, 오이디푸스 이야기 등 인류의 오래된 서사는 대부분 살인에 관한 것”이라며 “어렸을 때부터 살인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자살이 빈번한 헌병대 수사과의 군 생활도 이 주제에 빠져드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한 선악의 관점에서 살인을 보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을 죽인 연쇄살인범이 허물어지는 방식에 관한 얘기예요. 끝까지 세상과 자신을 통제하고 있다는 듯 망상을 만들어가며 버티지만 시간과 질병 앞에서 서서히 파멸해가죠. 굳이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우리 인간은 모두 실패한다는 거예요. 시간과의 싸움, 늙음과 죽음 앞에서는 모두 진다는 거죠.”
김씨는 해외 진출이 가장 활발한 한국 작가 중 하나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등 그의 작품은 대부분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 번역 출간됐다. 그는 “내 소설은 성서, 신화 등 서양의 오래된 이야기의 원형에 맞닿아 있고 이를 현대적인 설정으로 풀어낸다”면서도 “결국 문학은 모국어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번역된 책은 오래전에 헤어진 여자친구가 애를 데리고 나타나는 것과 같아요. 내 아이인 것 같은데 알아볼 수도 없고(웃음). 해석이 안 되니 소통하기 어렵죠. 결국 내 문학은 모국어로 하는 거구나, 모국어로 읽는 독자들이 내 독자구나 싶어요.”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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