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가 만난 모교 총장
유기풍 총장
논문 개수 채우는 연구, 기업이 거들떠도 안 봐
대학원에 창업트랙 개설
이우현 사장
정답만 맞히는 인재보다 도전하는 인재 필요
지방근무 꺼리지 말아야
사회 / 박기호 지식사회부장
1988년 6월 서강대 화학공학과 열역학 기말고사 시간. 시험지를 받아든 학생들 사이에서 ‘으악’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또 이런 문제야’라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문제는 ‘초원의 집(당시 방영되던 미국 드라마)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적절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방법을 서술하시오’였다. 학생들 사이에 ‘악명’을 떨치는 시험 문제를 내기로 유명했던 유기풍 화학공학과 교수와 참담한 성적을 받아들었던 이우현 학생(화학공학과 87학번)이 서강대 총장과 유화업체 OCI의 최고경영자(CEO)로 최근 다시 만났다.
▷사회=총장님 수업이 그렇게 어려웠나요.
▷이우현 사장=산더미 같은 과제에 매 수업 쪽지시험이 기본이었습니다. 시험은 대부분 교재와 계산기뿐 아니라 어떤 자료를 갖고 와도 되는 ‘오픈북 테스트’였습니다. 정답을 맞히기보다 무엇이 문제인지부터 찾아야 하는 시험이었죠. ‘초원의 집’ 문제가 20년 넘은 지금도 꿈에 나올 정도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총장님뿐 아니라 다른 교수님들도 비슷했죠. 한국 교육의 문제가 시험 잘 보는 사람만 키우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참 제대로 가르쳐 주신 것 같습니다.
▷유기풍 총장=올해 교수 생활 30년째입니다만 똑같은 문제를 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수업 시작 5분 전에 출석부터 부르고 종 치면 문을 잠갔죠. 개강 3주 만에 시험을 본 다음 평균 이상만 강의실에 들어올 수 있게 했고요. 사회에서 서강대 출신을 ‘믿고 쓴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지난 2월 총장에 취임하면서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셨습니다.
▷유 총장=세계 각 대학의 모델은 미국에서 250년가량 시행착오를 거치며 다져진 겁니다. 시장경제를 토대로 경쟁력을 갖춘 만큼 투자가 필수적입니다. 1900년대 중반까진 학생을 잘 가르치는 교육이 중심이었다면 이후엔 연구 역량이 곧 대학의 경쟁력을 나타냈죠. 최근에는 실리콘밸리를 이끄는 스탠퍼드대 같은 기업가형 대학이 바람직한 모델로 꼽힙니다. 교육 측면에선 대학이 배출한 인재가 기업가로 성공해 기부함으로써 대학의 재정을 튼튼하게 하는 겁니다. 연구에선 교수의 연구 성과를 기업이 활용하는 과정에서 수익으로 돌아오고요. 대학은 이런 재정을 바탕으로 더 좋은 교육과 연구를 하는 선순환 구조가 잡혀야 합니다.
▷이 사장=대학이 기업가 정신을 갖는 건 기업과 대학이 할 수 있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습니다. 기초 연구나 작은 공정을 개선하는 소규모 신기술 개발은 대학이 낫죠. 기업은 해보고 싶은 것도 많고 해보지 않으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것도 많지만 영리성이 없으면 직접 뛰어들기 힘듭니다. 그런 기술들을 대학이 적극적으로 해준다면 그만큼 고마운 일이 없죠.
▷유 총장=스탠퍼드대의 1년 예산이 4조원가량입니다. 3분의 1은 산학협력과 기술지주회사를 통해 들어옵니다. 대학의 연구가 지적재산권이 되는 거죠. 창조경제가 추격형에서 선도형으로 탈바꿈하자는 것 아닌가요? 대학도 향후 10년 20년 먹거리가 될 연구를 해야 합니다.
▷이 사장=OCI는 기본적으로 화학 기업이긴 하지만 태양광발전도 하고 다른 에너지도 개발하기 때문에 전기 등 여러 분야의 인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전기 분야 우수 인력은 화학이나 화학공학 전공자에 비해 채용하기 어렵습니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분야에 인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은데 산학협력은 이런 부분까지 메워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산학협력을 어렵게 만드는 걸림돌은 어떤 건가요.
▷이 사장=인적 교류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국내에선 서울대와 KAIST, 포스텍과 서강대 정도가 교수님들이 적극적으로 기업을 찾아 나서는 편입니다. 화학 분야는 이론을 검증하려면 굉장히 많은 절차가 필요한데 그런 설비를 대학이 갖추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회사가 갖고 있는 설비를 더 많이 활용할 수 있는 길을 대학과 함께 찾으려고 합니다.
▷유 총장=공대 교수의 연구에 기업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연구가 아닙니다. 논문 개수나 채우기 위한 연구는 기업에서 거들떠보지도 않죠. 연구만 훌륭하면 되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시장을 알아야 좋은 연구도 되는 겁니다. 저도 기술만 믿고 두 차례 창업했다 모두 실패했습니다. 사업 마인드가 부족했던 탓이죠. 그래서 산학협력단 안에 서강미래기술원을 만들었습니다. 교수가 창조한 기술에 마케팅 등 경영을 접목시켜주는 벤처 인큐베이팅 기구입니다. 또 하나 산학협력의 걸림돌은 교수 간 교류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앞으로 목적 지향적인 연구 그룹을 활성화할 계획입니다.
▷사회=학내 반발도 예상됩니다만.
▷유 총장=교수가 학내에만 갇혀 있다 보면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회와 교류가 없으면 대학은 침체되기 마련입니다. 대학이 발전하려면 문호를 개방해야 합니다. 외부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을 계속 데려와야 합니다. 교수가 인기 있는 직업이라는 건 그만큼 기득권이 크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교수들부터 교수가 평생직장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이 더 발전할 수 있습니다.
▷사회=기업가정신 교육은 어떻게 하실 계획이신가요.
▷유 총장=국내 대학 어디도 돈이 중요하다는 걸 가르치는 곳이 없습니다. 심지어 경제학과마저 그렇습니다. 그러니 자꾸 기업가와 부자를 적대시하는 풍조가 생기는 겁니다. 대학이 학생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줘야 합니다. 우선 1학년 필수 교양으로 기업가정신 과목을 개설하고 창업 관련 교과목도 대폭 늘릴 계획입니다. 대학원에도 창업 트랙을 개설하고요. 21세기 지식기반사회는 경영학과 이공계가 이끌고 인문학은 뒷받침하면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지만 인문학이 중심인 건 아니죠.
▷이 사장=최근 실무형 인재가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기업가정신과 같은 기초 인성 교육이 더욱 중요합니다. 일을 배우는 건 기업에 와서 하는 겁니다. 우리가 쓸 기술을 왜 대학이 안 가르쳤느냐고 책임을 떠넘기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기업이 필요한 기술이 있다면 학원을 세워서 가르치면 되죠. 아쉬운 부분은 지방에서 기꺼이 근무할 수 있는 인재가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은 학생이나 대학을 탓할 수는 없고 우리 사회가 같이 고민해야 할 부분입니다.
▷사회=대학생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이 사장=지방에서 근무하다 보면 저녁에 시간이 참 많은데 별로 하는 일 없이 보내는 직원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대학 다닐 때 자기 계발하는 연습을 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OCI는 남이 하는 사업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길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정답만 잘 맞히는 인재보다는 도전적인 인재가 필요합니다. 대학생 시절에 여러 경험을 해보는 게 스펙 쌓는 것보다 더 좋은 직장에 갈 수 있는 길입니다. 후배들이 축제다 미팅이다 술마시고 놀 시간을 자기 계발에 투자하면 좋겠습니다.
정리=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
■ 유기풍 총장은
고려대 화학공학과(70학번)를 졸업하고 미국 코네티컷대에서 화학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 서강대 교수로 임용돼 학생처장, 산학부총장 등을 거쳐 지난 2월 14대 총장에 취임했다.
■ 이우현 사장은
서강대 화학공학과(87학번) 출신으로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경영전문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OCI그룹 창업주인 고 이회림 전 회장의 장손이자 이수영 회장의 장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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