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녀의 벽 깬 女정비사 4인
여성 눈썰미·색채 감각 좋아 …도장 분야 등 경쟁력 있어
부품·장비 가벼운 전기車 시대…섬세함 앞세운 여성 영역 늘듯
작업 속도 맞출 체력 필수…밥 두 배로 먹어도 살 안쪄
남자친구와 車얘기로 소통…가족·친구 이젠 격려 많이해
자동차 정비 분야는 여성들에게 여전히 불모지다. 국내 시장 점유율 70% 이상인 현대·기아자동차에도 여성 정비사는 한 명도 없다.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수입차 업계에서 활약하는 여성 정비사 4인방을 찾았다. 김혜진 아우디 위본모터스 서초서비스센터 도장 총괄팀장(44), 유샘이 BMW코리아 코오롱모터스 분당서비스센터 엔지니어(40), 신소희 폭스바겐 아우토플라츠 오포서비스센터 매니저(26)와 박혜연 메르세데스 벤츠 모터원 일산서비스센터 매니저(26)다. ‘왕언니’인 김씨는 남자도 버티기 힘들다는 이곳에서 도장 경력 15년 이상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네 명 중 유일하게 도장이 아닌 정비를 맡고 있는 유씨는 뛰어난 실력으로 BMW에 발탁된 인재다. 입사 1년차 새내기인 신씨와 박씨는 대학 졸업 후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열정 하나로 뛰어들었다. 지원도 부족하고 업무 환경이 열악한 이곳에서도 꿈을 키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혜진=하루 종일 여자 한 명도 못 보는 날이 많은데 이렇게 여러 명을 마주하니 어색하네요. 전 소프트볼 국가대표 선수로 활동하다 자동차가 좋아 이 일을 시작했어요. 공업사, 정비소에서 현장을 경험했고 아우디에서 일하면서 서울정수기능대에서 이론을 다졌죠. 국내 자동차 회사는 경쟁이 치열하고 남성 위주이다 보니 수입차 업계에 그나마 여성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유샘이=전 어렸을 때 꿈이 정비사였어요. 대학에서 무역학과를 전공했는데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서른의 나이에 정비를 배웠죠. 이 악물고 공부해 좋은 성적을 받았는데 나이도 많은 여자라고 뽑아주지 않더군요. 감사하게도 BMW에서 어프렌티스(견습생) 과정에 넣어줬습니다. BMW가 절 구제해줬죠.
▶신소희=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일반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다가 방향을 틀었어요. 자동차 외장 쪽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도장 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나서도 1년 반 정도 취업이 안돼 마음 고생을 했어요. 대부분 정비센터에는 여성용 탈의실, 화장실, 샤워시설이 없어서 여자를 채용하는 걸 부담스러워해요. 탕비실에서 정비복만 갈아입고 집으로 가야 된다는 점을 제외하면 다들 잘해주셔서 좋아요. 다들 힘든 점은 없으세요?
▶박혜연=배로 실어온 차를 출고하기 전에 항구에 보관하는 PDI 센터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요. 야적장에 나열된 수천 대의 차 중에 고객이 주문한 차를 찾아야 해요. 겨울엔 손을 호호 불어가며 눈 맞은 유리창을 닦아 번호를 대조한 다음 하루에 300대가량 몰딩기로 광 내는 작업을 해요. 눈, 비, 새똥을 맞아서 더러운 차를 새차로 만들기 위해 도색 작업도 해야죠. 출고가 밀려 있어서 밤 12시까지 광을 내는데 퇴근할 때면 손이 덜덜거린답니다. 이때를 생각하면 지금 서비스센터 일은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일보다는 남자보다 잘해야 한다는 게 스트레스죠.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남자들과 똑같이 해선 안되니까요. 체력이 달려서 속도를 못 내는 것도 속상하고요.
▶유=힘 쓰는 건 남자를 못 당하죠. 저도 처음엔 온몸에 멍이 들고 근육통이 생겼어요. 21인치 광폭 타이어를 갈아끼우다가 장비도 많이 부러뜨렸고요. 타이어를 망가뜨린 적도 있죠. 이제는 요령이 생겨서 괜찮아요. 다만 생리통 같은 사소한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서 혼자 끙끙 앓기는 하죠.
▶신=도장 파트는 화학약품이나 기름 독이 피부에 올라서 두드러기가 날 때가 있어요.
▶김=지금은 많이 좋아진 거예요. 옛날엔 장갑을 껴도 피부질환이 생길 정도로 약품이 독했으니까. 손톱이 빠지고 손등이 갈라져서 피가 나는 건 예사였어요. 여름에도 바세린을 듬뿍 발랐죠. 장비도 많이 발전했어요. 차체 표면을 깎아내는 에어샌더기를 쓰면 덜덜거리는 소음에 귀도 아프고 작업이 끝나도 팔이 떨렸는데 요즘엔 무진동 기계가 나와서 좋더라고요. 도장은 여자 후배들에게도 추천해주고 싶어요.
▶박=도장은 여자들이 경쟁력이 있는 것 같아요. 색채 감각이나 눈썰미가 있으니까 일하기 수월하거든요. 여자들은 다이어트할 필요가 없다는 부가적인 효과가 있어요. 안에서만 일하는데도 하루에 2만보 정도 걷는답니다. 밥 먹는 양은 2배 늘었는데도 살이 안 쪄요. 대신 야근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좋아야 해요. 정해진 기간에 도색 작업을 완료해야 하는데 도장은 날씨와 계절의 영향을 많이 받거든요. 장마철엔 도료의 성질이 변해서 벌레도 생기고 관리를 잘해야 하는데 문제가 생기면 야근도 불사해야죠.
▶유=정비도 여자라는 점이 좋을 때가 있어요. 2년차 때 고장난 차가 있으면 정비해주는 긴급출동서비스팀에 투입됐는데 새벽에도 나가야 하는 고된 일이었습니다. 고객들은 수입차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데 차에 문제가 발생하면 불만이 커지죠. 일단 여자 정비사가 오면 고객분들이 신기하니까 화를 잠시 누그러뜨리세요. 제 소개를 하다보면 말문도 트이고요. 남자들보다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고 고마워하시죠. 한번은 BMW 중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X5의 타이어가 펑크가 났는데 보험사 직원들도 타이어를 빼지 못해서 쩔쩔 매는 걸 제가 와서 해결했더니 놀라더라고요. 뿌듯했습니다. 힘든 만큼 보람이 있죠.
▶박=전 남자친구가 자랑스러워해요. 차를 좋아하니까 격려도 많이 해주고요.
▶신=저도 응원을 많이 해줘요. 이야기도 잘 통하고 제게 차에 대해 물어보기도 하고요.
▶김=예전엔 험한 일 한다고 가족, 친구들 다 뜯어말렸는데 많이 달라졌네요. 제가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여자가 이런 일을 왜 하냐, 이러니 남자들이 할 일이 없어지지’하고 얘기하실 때 울컥하죠. 시대가 바뀌었으니 똑똑한 여학생들이 많이 지원해서 점차 개선해나갔으면 좋겠어요. 다만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건 아직까지 여긴 남자들의 세계라는 것이죠. 여자로 보이는 순간 살아남지 못해요.
▶유=저희가 2세대라면 앞으로 3세대 여성 정비사들이 활약할 시대가 올 거라 믿습니다. 앞으로 전기차 시대가 오면 부품, 장비도 더 가벼워지고 기술도 진화할 테니까요. 저처럼 정비사 꿈을 가진 후배가 있다면 도전해보세요. 다른 일을 하다 늦깎이로 시작한 저도 꿈을 이뤘으니까요.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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