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장의 교양] (10) '데우스 엑스 마키나, 기계장치의 신'

입력 2013-06-21 14:42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대하여

몇 해 전 ‘디 워’라는 영화를 두고 큰 논쟁이 벌어진 일이 있습니다. 영화 한편에 무슨 호들갑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논쟁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100분 토론’이라는 한 시사 프로그램의 토론 주제로 선정될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이 영화에 열광한 사람은 참 많았습니다. 그 뜨거운 관심은 총 관객수 840만명, 2007년 흥행 1위, 역대 한국 영화 흥행 10위라는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물론 모두 환호한 것은 아닙니다. 못마땅해 한 사람들도 있었죠. 대표적인 사람이 평론가 진중권입니다. 그는 애국심 마케팅 덕분에 흥행한 것일 뿐,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매우 부족하다며 ‘디 워’의 가치를 평가절하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누리꾼이 그를 비판하기도 했죠. 다 지난 일을 왜 다시 언급하냐고요? 그때 진중권 평론가가 ‘디 워’를 비판하면서 거론한 한 마디 때문입니다. 그는 어느 칼럼에선가 ‘디 워’가 결말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도입했다고 비판했습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무슨 말일까요? 그리고 왜 이것이 ‘디 워’에 대한 비판에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데우스 엑스 마키나. 우리는 이 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역사에서 한 손에 꼽히는 철학자입니다. 그는 특별한 사제관계로도 유명합니다.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이 그의 스승이고, 대제국을 건설한 젊은 황제 알렉산더가 그의 제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플라톤이 세운 서양 최초의 학교인 아카데미아에 17살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20여년간 플라톤에게 철학을 배웠죠. 플라톤이 죽은 후에는 아카데미아를 떠나 잠깐 동안의 방랑기를 겪고 마케도니아의 왕자 알렉산더의 가정교사를 했습니다. 그후에는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이라는 학교를 세워 평생을 공부에 매진했죠. 얼마나 책을 좋아했는지 스승 플라톤은 그에게 “책벌레”라는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학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진 장점은 폭넓은 호기심이었습니다. 그는 철학 이외에도 생물학, 천문학, 수사학, 논리학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광대한 지성의 소유자였습니다. 문학과 예술 또한 그가 큰 관심을 보였던 분야였죠.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와 같은 서사시나 ‘오이디푸스 왕’이나 ‘안티고네’와 같은 비극 작품의 열정적인 독자였던 그는 결국 문학 창작에 대한 이론서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시학’입니다. 이 책은 말하자면 서양 최초의 문예 비평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문학의 본질과 구성요소, 좋은 문학의 요건 등을 다룹니다. 모두 매우 오랜 기간 서양의 문예 비평에 큰 영향을 끼친 내용들입니다. 심지어 우리조차 ‘시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카타르시스’ 이론입니다. 카타르시스. 많이 들어본 표현이죠? 이 개념을 예술과 관련해서 처음 사용한 사람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본래 ‘정화’ 혹은 ‘배설’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그에 의해 예술을 통한 감정의 정화 및 해소라는 확장된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짜릿한 액션 영화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이야기할 때, 우린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 규정을 따르고 있는 셈입니다.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 작품이 갖춰야 할 것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중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이야기의 개연성과 일관성이었습니다. 인물의 성격도, 표현의 아름다움도 모두 중요하지만, 이야기의 짜임새가 허술하다면 결코 좋은 문학작품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예로 들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다. (...) 어떤 시인이 성격을 잘 나타내주는, 그리고 조사와 사상에 있어서 훌륭하게 손질된 일련의 대사를 차례차례 내놓는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아직 비극의 진정한 효과를 산출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점에서는 다소 미비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플롯, 즉 사건의 결합을 구비한 비극이 훨씬 더 중요한 효과를 산출할 수 있을 것이다. (...)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를 쓸 때 주인공에게 일어난 사건을 모두 취급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오디세우스가 파르낫소스 산에서 부상당한 일이라든지, 출전 소집을 받았을 때 광증을 가장한 사건은 취급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 두 사건 사이에 필연적 또는 개연적 인과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은 통일성 있는 행동을 주제로 하여 ‘오디세이아’를 구성했던 것이다. ‘일리아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다른 모방 예술에 있어서도 하나의 모방은 한 가지 사물의 모방이듯, 시에 있어서도 스토리는 행동의 모방이므로 하나의 전체적 행동의 모방이어야 하며 사건의 여러 부분은 그중 한 부분을 다른 데로 옮겨놓거나 빼버리게 되면 전체가 뒤죽박죽이 되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있으나마나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전체의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생각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막장 드라마’라는 말이 있죠. 그 말을 언제 사용하나요? TV 드라마에서 사건이 전혀 개연성 없이 이어질 때 그렇게 말하곤 하죠. 느닷없이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다든지 악인이 사고로 죽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죠.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하는 것도 그와 비슷합니다. 문학 작품의 완성도는 사건들의 결합이 얼마나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개성 있는 인물과 감각적인 대사가 잠시 이목을 끌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야기 자체가 부실하다면 최종적인 평가는 그리 좋지 못할 테니 말입니다. 이야기의 개연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나요? 그렇다면 이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의미를 알아볼 차례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들어보죠.



“성격에 있어서도 사건의 구성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필연적인 것 혹은 개연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러이러한 사람이 이러이러한 것을 말하거나 행할 때 그것은 그의 성격의 필연적 혹은 개연적 결과라야 하며, 두 사건이 이어서 일어날 때는 후자는 전자의 필연적 혹은 개연적 결과라야 한다. 따라서 사건의 해결도 플롯 자체에 의하여 이루어져야지, ‘메데이아’나 ‘일리아스’에서 그리스 군의 출범이 저지당했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계 장치에 의존해서는 안 됨이 명백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건의 해결이 플롯 자체에 의한 것이어야지 기계 장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 기계 장치가 바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기계 장치의 신’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연극 문화를 알아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당시 그리스 연극에는 거중기와 비슷한 형태의 기계 장치가 자주 등장했습니다. 기계 장치를 이용해 사람을 공중에 띄우고 그가 복잡하게 꼬인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게 했던 것입니다. 공중에 떠 있는 사람이 마치 신처럼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도록 한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비꼬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가 이야기 자체의 힘으로 해소돼야지 느닷없는 신적 개입으로 마무리되는 건 전혀 창조적이지 않다는 것이었죠. 이야기가 부실한 영화, 소설, 드라마를 볼 때, 나아가 자신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줄 초인 혹은 백마 탄 왕자를 막연히 기다리는 사람에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여전히 유효한 비평 개념입니다.

김영수 S·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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