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넘은 피의사실공표] 남 허물은 알리고 제 잘못은 덮고…검찰의 두 얼굴

입력 2013-06-14 17:29
수정 2013-06-15 01:53
피의사실 교묘히 흘리고

정·재계 등 거물급 피의자 압박전략으로 사용
사실 무관한 사생활까지 공개 '인권침해' 논란
수사 공보지침 있으나 마나
선진국, 피의사실 유출땐 '법정모독죄' 적용
검·경 정보에만 의존하는 취재 관행도 문제


#1. 2006년 4월30일. “일부 언론에 영장이 사전 유출됐는데 윤곽은 확인됐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당시 채동욱 대검찰청 수사기획관(현 검찰총장)은 “수사를 중단하는 일이 있더라도 영장 유출 경위를 조사하고, 검찰 내부자 소행으로 드러나면 엄단하겠다”고 답했다. 유출자가 검찰 쪽이면 피의사실 공표를 적용한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유출자 색출은 실패로 끝났다. 당시 대검 중앙수사부가 론스타·현대차 사건을 수사 중인 상황에서 피의자를 상대로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 내용이 법원 심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통째로 특정 언론에 유출돼 논란을 빚었다.

#2. 2013년 6월14일. “국가정보원 선거개입 의혹 사건의 수사 결과 발표가 임박한 시점에서 일부 수사 참고자료가 대외적으로 유출되는 심각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수사기밀 누설이나 피의사실 공표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유출자를 밝히기 위한 특별 감찰을 지시했습니다.” 채동욱 검찰총장은 이날 원세훈 전 국정원장 관련 수사 결과 발표에 앞서 한 조간신문이 수사 결과가 담긴 검찰 내부보고서를 통째로 입수, 보도한 데 대해 이같이 말했다. 앞서 채 총장은 취임 직후인 4월23일 검찰 내부통신망을 통해 ‘반성문’을 썼다. “그간 우리의 무책임으로 피의사실이 유출돼 사건 당사자의 명예에 손상을 입혔다. 부끄러운 과거가 되풀이돼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하지만 두 달도 채 안 돼 피의사실 유포 논란이 빚어졌다.

○수사기관이 피의사실 흘리는 이유

법무부 훈령인 ‘인권보호를 위한 수사공보준칙’에는 피의사실 공표와 관련한 주의사항이 빼곡히 적혀 있다. 기소 전 수사 상황은 공개금지(9조)가 원칙이다. 사건 관계인의 소환 여부, 소환일시, 구속영장 등 수사 관련 서류는 기소 전 공개가 금지되지만 언론사의 과다한 취재 경쟁이나 오보 등을 막기 위한 경우 수사 상황을 공개할 수 있도록 했다. 수사 상황 공개는 공보담당관이 검찰청장의 승인을 받은 공보자료에 대해 익명으로 하도록 규정했다(7조).

그러나 예외가 많고,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수사기관이 그려놓은 방향대로 수사가 진행되지 않을 경우 불법 유혹에 빠지기 쉽다. 원 전 원장을 둘러싼 피의사실 공표 논란은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과 법무부 간 의견 충돌이 발단이 됐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간혹 피의사실과 무관한 사생활이 언론에 공개되는 경우도 있다.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이용해 피의자의 도덕과 기업 이미지에 흠집을 내는 것은 자백을 압박하는 수단이 된다. ‘물방울 다이아몬드’ ‘명품브랜드 핸드백’ ‘내연관계’ 등이 등장하는 이유다.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당시 흘러나온 ‘논에 억대 피아제 시계를 던졌다’는 내용은 수사 주체가 아니면 확인하기 힘든 것이었다. 자녀나 배우자가 언론에 노출되면 모르쇠로 일관하던 피의자가 항복하는 사례도 종종 있다.

이런 이유로 피의사실에 대한 예단이 생기고, 법원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피의자의 헌법상 권리는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이다.

○수사기관에 의존하는 취재 관행

원 전 원장 사건 같은 ‘대형사건’이 터지면 검찰과 출입기자들은 거의 매일 브리핑 시간을 갖고 ‘스무고개’식 문답을 주고받는다. 사건 진행 상황을 가능하면 두루뭉술하게 설명하려는 검찰과 구체적 혐의를 파악하려는 언론 사이의 치열한 신경전이다. 이 과정에서 피의사실이 유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국민의 알권리’ 충족을 넘어서 언론사 간 취재 경쟁이 가열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피의자에게 돌아간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비자금 조성 및 탈세 의혹 사건에서도 사건 초기 상상 가능한 의혹들이 쏟아져 나왔다. 과거 정부 차원에서 장려한 무기명 채권을 활용한 증여를 불법 탈세로 보도한 언론도 상당수였다.

보다 못한 검찰이 수사 중인 내용과 전혀 혐의를 두고 있지 않은 내용을 ‘가지치기’해주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런 와중에 피의사실이 하나 둘 검찰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이다.

중앙수사부가 없어지면서 대검찰청은 대변인이, 서울중앙지검은 3차장 검사가 언론의 창구가 되는 공보담당 검사 역할을 하고 있다. 수사준칙에 따르면 이들 이외에는 수사 상황과 관련해 기자와 접촉할 수 없도록 돼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피의사실 유출은 ‘법정모독죄’

선진국들은 국민의 알권리보다 피의자의 인권보호에 더 치중하는 편이다.

영국에서는 피의자의 체포와 공소제기 이전에 피의사실을 보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법정모독죄’로 처벌한다. 언론은 피의자의 자백을 인용하지도 못하고 자백했다는 사실조차 보도할 수 없다. 배심제 국가인 영국에서는 재판 과정이나 사전에 배심원들에게 편견을 심어주는 모든 행위가 금지된다.

미국은 한국의 수사준칙 같은 연방검사업무지침이 있다. 이 지침은 ‘대(對)언론관계’장에서 수사기관 브리핑의 한계와 시점, 주의사항을 상세히 규정하고, 피의자의 범죄 전력이나 진술, 유무죄에 관한 의견 등의 언론 공개를 금지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수사 중인 사건은 원칙적으로 언론에 발표하지 않는다. 테러 사건이나 정치적 스캔들처럼 사회적 관심이 집중된 사건에 한해 예외적으로 언론 브리핑을 한다. 이때도 가치평가를 배제하고 사실 관계만 공개한다.

일본 형법에는 피의사실공표죄가 없다. ‘기소 전의 범죄행위에 관한 사실은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으로 본다’(형법 230조의2)는 유사 규정만 있다.

김병일 기자 kb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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