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경제위기를 걱정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선진국의 양적완화 축소, 엔저 같은 나라 밖 요인 탓만은 아니다. 정체 모를 무언가의 괴물이 우리 몸체 내부에서 스멀스멀 번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위기의 징후다.
과거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때는 위기의 증거들이 뚜렷했다. 환율 폭등, 주가 폭락에 누구나 쉽게 중병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각 증상도 거의 없다. 거시지표만 보면 기우일 정도다. 경상수지는 흑자행진이고 환율 주가 금리도 걱정거리는 아니다. 부도 사태도 없고 실업률은 사상 최저수준이다. 물가 상승률은 고작 1%대다. 하반기엔 3%, 내년엔 4% 성장이 가능하다는 게 정부의 전망이다.
6월 국회 '乙지키기' 법안 16개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눈에 안 보이면 없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증거의 부재(不在)가 부재의 증거는 아니다(Absence of evidence is not evidence of absence)’라는 서양 격언도 있지 않은가. 맥킨지의 지적처럼 한국 경제가 ‘서서히 뜨거워지는 냄비 속 개구리’가 된 탓인지도 모른다.
8분기 연속 0%대 저성장인데도 1분기 0.8%(전분기 대비) 성장을 ‘선방’이라고 여길 만큼 온통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상장사들조차 1분기 매출과 순익이 줄었고, 10곳 중 3곳이 적자다. 30대그룹 치고 비상경영이 아닌 곳이 없다.
하지만 진짜 위기 징후는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정신적 요인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과연 현상의 이면에 숨겨진 원인에 천착해 합리적 해법을 도출할 만한 경제 지력(知力)을 가졌다고 볼 수 있을까. 땀 흘리는 사람보다 목소리 큰 사람이 더 기세등등한 세상이 된 지도 오래다. 정치는 이에 편승해 정의의 사도인 양 ‘차카게 살자’를 외치며 정치 만능주의로 치닫는다.
그 결과가 경제민주화의 과잉입법이요, 법치의 오·남용이다. 갑을 문제의 본질은 불황과 유통구조 변화에 있는데도 갑인 대기업을 때려잡으면 OK라는 식이다. 역세권 100m를 줄자로 재고, 두부로 큰 기업도 덩치가 크니 두부에서 손 떼라는 식의 규제도 서슴지 않는다. 마치 자동차가 마차보다 빨리 달리면 안 된다는 100년 전 금지법이 연상된다.
경제 거덜나야 광풍 그칠까
지금은 남북대화에 가려 있지만 6월 국회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 민주당이 관철시키겠다는 ‘을 지키기’ 법안만 16개다. 소위 ‘을지로(乙 지키는 law) 3법’이라는 프랜차이즈·대리점·하도급 보호법을 비롯해 남양유업·CU 방지법, 일감몰아주기법… 등등. 여당인 새누리당도 재벌 금융회사의 계열사 지분한도를 15%에서 5%로 축소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그것도 계열 금융회사별로 5%가 아니라 합산해서 5% 이내다. 당장 15개 그룹에서 경영권 방어에 6조원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통상임금, 정년연장, 대체휴일제까지 더해지면 비용은 눈덩이다. 이러고도 경제가 잘 굴러가고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모르는 상태에서 당하는 위기만큼 두려운 것도 없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면 더욱 그렇다. 럼스펠드가 언급한 ‘언노운 언노운스(unknown unknowns)’의 상황이다. 한국인은 위기에 강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들 하지만 정작 겪어보기 전에는 잘 모른다는 단점도 있는 게 사실이다.
결국 시장을 파괴하고 혁신을 부인하고 결과의 평등을 요구하는 무지(無知)의 광풍은 마이너스 성장을 겪어봐야 수그러들지 않을까 싶다. 정치인들은 날계란과도 같은 경제를 너무 험하게 다룬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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