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받는 항민 원망하는 원민…사회변혁의 때 기다리는 호민
하지만 조선엔 원민도 없으니…
‘홍길동전’의 주제는 혁명이다. 하지만 현실 개혁 대신 율도국으로 들어가 자신만의 나라를 건설하는 홍길동의 뒷모습에는 혁명을 꿈꾸면서도 여전히 현실을 부정하지 못하는 이중의 정체성을 가진 허균이 배어 있다. 그런 허균의 글 가운데는 혁명을 이야기하면서도 혁명을 부정하는 ‘호민론’이 있다.
“천하에 두려워할 만한 것은 오직 백성뿐이다. 성공을 함께 즐기며 일상에 얽매여서 순순히 법을 받들고 윗사람에게 부림을 받는 자는 항민(恒民)이다. 항민은 두려워할 것조차 없다. 가렴주구에 가죽이 벗겨지고 뼛골이 부서지는데도 번 것은 모두 갖다 바친다. 끝없는 요구에 괴로워하고 한숨 쉬며 윗사람을 헐뜯는 자는 원민(怨民)이니 원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백정이나 장사치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몰래 이심을 품고는 천하를 엿보아 시절이 어지러워지면 자신이 바란 것을 이루려는 자는 호민(豪民)이니, 저 호민이야말로 크게 두려워할 만한 존재다. 호민이 나라의 분열을 엿보고 시절의 어지러움을 틈타서 밭도랑 가운데서 한번 치고 일어나면 저 원민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여서 모의하지 않고도 한목소리를 낸다. 그러면 저 항민도 역시 살 구멍을 찾아서 몽둥이와 낫을 들고 따라 나서 무도한 임금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진나라는 진승(陳勝)과 오광(吳廣) 때문에 망했고, 한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또한 황건적 때문이며, 당나라가 쇠퇴해지자 왕선지(王仙芝)와 황소(黃巢)가 기회를 틈타서 마침내 나라를 망치고야 말았다. 이는 모두 백성을 가렴주구해 자신만을 배불렸기에 호민이 그 틈을 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땅은 좁고 사람은 적다. 백성은 잗달고 악착스러워 기절이나 협기가 없다. 따라서 태평한 시대에 대단한 인물이 나서 세상에 쓰이지도 않지만, 난세라고 하여 호민이나 한졸(卒)이 나와 백성을 선동하여 국가의 근심이 되는 일도 없으니 이 또한 다행이다.”
허균이 피지배층의 성격을 분류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항민 원민 호민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분류한 것도 재미있지만, 그 분류의 기준이 현실의 수용 태도와 반란에서의 역할이라는 점이 더욱 흥미롭다. 현실에 순응하는 항민과 부당한 현실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지만 대항하지 못하는 원민은 아무리 많아도 두려워할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총이 있고 총알도 있지만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으면 결코 총이 발사되지 않듯이 방아쇠와 같은 역할을 하는 호민이 두렵다는 말이다. 조선엔 방아쇠가 없다는 것을 지배층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마음대로 가렴주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고려와는 다르다. 고려 때에는 백성에게 세금을 매겨도 한도가 있었다. 또 세금이 들어올 것을 헤아려서 쓸 것을 정하여 나라에 비축이 있도록 하였다. 조선은 그렇지 않다. 몇 안 되는 가난한 백성을 가지고 중국과 똑같이 예법을 차려서 귀신 섬기고 조상 모신다. 백성의 세금이 국가로 들어오는 것은 겨우 2할이고 나머지는 간사한 무리에게 낭자하게 흩어진다. 백성의 원성은 고려 말보다 높은데도 윗사람들이 편하게 앉아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에 호민이 없기 때문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지금까지의 잘못을 고친다면 그나마 괜찮을 것이다.”
지배층의 수탈이 심할수록 항민과 원민은 끊임없이 공급되고 그럴수록 변화에 대한 욕구는 임계점에 가까워지게 된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도 왕조는 바뀌지 않았다. 아무리 임계점에 도달해도 호민 없는 조선은 방아쇠 없는 총과 같아서 터지는 일이 없다고 주장한 허균의 말이 짐짓 맞아도
보인다. 그런데 정말 항민과 원민은 끊임없이 양산되었을까. 허균의 말대로 항민은 자의식이 없으니 기층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존재를 증명한다. 하지만 원민은 어떤가. 홍길동전이나 춘향전에서는 탐관오리를 꾸짖고 징벌한다. 그런데 가만 보면 징벌하는 것도 양반이요, 징벌받는 것도 양반이다. 그 어디에도 원민은 보이지 않는다. 허균의 말과는 달리 항민은 있을지언정 원민이 없었기에 혁명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서정문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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