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만날 문장은 소크라테스(Socrates·BC469?~BC399)의 것이에요. 너무나도 유명한 철학자죠.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하고요. ‘철학’이라는 말이 나오니까 바로 머리가 아프다고요? 아이고, 그럴 만도 해요. 철학자들이란 쉬운 말도 어렵게 꼬아서 하는 데 특별한 재능을 가진 별난 사람들이니까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오늘 공부할 문장은 이미 여러 번 들어본 말일 테니까요. 바로 “gnothi seauton, 그노티 세아우톤”입니다. 번역하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에요.
자기 자신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 그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죠. “너 자신을 알라”라는 단순한 명제가 이토록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몰라요. 소크라테스의 말로 알려져 있지만, 저 말은 사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져 있던 문구였어요. 당시 아테네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을 만큼 유명한 말이었죠. 철학사가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저 말의 주인공은 고대 그리스의 7현인 중 한 명이었던 탈레스였다고 해요. 물론 이 역시 정확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어쨌든 소크라테스가 처음 한 말이 아닌 것은 분명하죠. 그렇다면 왜 저 말이 소크라테스의 이름과 함께 전해지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저 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찾아냈기 때문이에요.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라는 책에 그 내용이 들어 있어요. 그 내용을 한번 살펴볼까요?
언젠가 한 사람이 신전에 찾아가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는지 물어봤다고 해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점을 본 것이죠. 그런데 떡하니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신탁이 내려오지 않았겠어요. 소크라테스는 어리둥절해졌답니다. 스스로가 지혜롭다고 생각해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고민고민 끝에 그는 신탁의 내용을 시험해보기로 했어요.
“도대체 그 신은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도대체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 내 자신이 다소간에 현자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터인데. 그렇다면 신이 나를 두고 가장 현명한 자라고 단언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으로 말하는 것일까?’ (중략…) 그러다가 저는 그야말로 겨우겨우 이와 같은 식으로 그 뜻을 알아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현자로 여겨지는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 제가 찾아간 겁니다. 그건 그 신탁에 대해, 어디서고 그럴 수만 있다면, 그 경우에 논박을 하고, 그 신탁의 응답에 대해 ‘여기 이 사람이 저보다도 더 현명한데도, 당신께선 제가 그러하다고 하셨습니다’ 하고 선언을 하려고 말씀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중에서, 플라톤 씀, 박종현 옮김
이렇게 해서 소크라테스는 똑똑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아테네에는 지혜롭다고 이름난 사람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질문에 척척 대답해줄 사람을 금방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죠. 그런데 웬걸요. 누구도 그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어요. 처음에는 자신이 엄청나게 박식하다고 자신하던 사람들도 소크라테스의 질문 몇 마디에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죠. 이렇게 사람들과 대화하던 중 소크라테스는 드디어 신탁의 의미를 깨닫게 됐어요.
“제 마음 속으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사람보다야 내가 더 현명하지. 그건, 실은 우리 중에서 어느 쪽도 훌륭하디 훌륭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하는 것 같은데도, 이 사람은 자기가 실은 알지도 못하면서 대단한 걸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나야, 사실상 내가 알지 못하듯, 알고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기 때문이지. 어쨌든 적어도 이 사람보다는 바로 이 사소한 한 가지 것으로 해서, 즉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은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이 사실로 해서, 내가 더 현명한 것 같아’라고 말씀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중에서
소크라테스가 현명한 사람이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죠. 그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너 자신의 무지함을 깨달아라”는 말로 이해했어요.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이렇게 부를 수도 있겠네요. 무지(無知)의 지(知)! 아니면 이렇게 말할까요? 지혜 없음의 지혜! 혹시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아니 무지(無知)의 지(知)라니 이게 무슨 말장난이람?‘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말이 아니에요. 앞에서 소크라테스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얘길 했었죠? 우리가 ‘철학’이라는 말로 번역한 영어 필로소피(philosophy)는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왔어요. ‘필로’와 ‘소피아’는 각각 ‘사랑하다’와 ‘지혜’를 뜻하는 말이에요. 그렇다면 필로소피아의 뜻은 무엇인가요? 그렇죠. 필로소피아란 ‘지혜를 사랑함’이란 뜻을 갖고 있어요. 철학이란 지혜를 사랑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스스로가 이미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과 아직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누가 더 지혜를 사랑할까요? 자신이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을 거에요. 공부란 스스로가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죠. 그러니 지혜란 늘 자신의 부족함을 자각하는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에요.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혜를 얻기 위한 첫 걸음인 셈이죠.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의 아버지라는 호칭이 붙을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끊임없이 지혜를 얻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너 자신을 알라”는 말에는 단지 자신의 무지를 깨달으라는 뜻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에요.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라는 청년과 대화하는 도중 ‘너 자신을 알라’는 말에 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 일이 있었어요.
“그러니 자신을 알라고 명하는 자는 우리에게 혼을 알라고 시키는 걸세. (중략…) 자신을 알려면, 혼을 들여다봐야 하고, 무엇보다도 혼의 훌륭함, 즉 지혜가 나타나는 혼의 이 영역을 들여다봐야 (하네)” -<알키비아데스 Ⅰ>, 플라톤 씀, 김주일정준영 옮김
인간은 영혼, 혹은 이성을 갖고 있기에 지혜를 추구할 수 있지 않나요? 인간에게 이성이 있다는 건 인간이 진리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걸 뜻하는 것이죠.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인간 안에 있는 그 가능성을 알라는 말이기도 해요. 그러니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두 가지 상반된 호소로 이해할 수도 있겠네요.
먼저 스스로의 무지함을 깨달으라는 요구입니다. 다음은 우리 안에 지혜를 알게 해주는 이성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호소입니다. 인간은 느리더라도 조금씩 진보할 수 있고,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에요. 이성을 갖고 있는 덕분이죠.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통해 인간의 무지함과 불완전함을 깨닫지만 거기서 멈춰 좌절하지는 않았어요. 그는 그 말을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가르침으로 이해하기도 했으니까요. 지혜를 찾게 해줄 이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라! 멈추지 말고 진리를 추구하라! 그러니 어떤 인간도 오늘의 누추함만으로 평가받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오늘과 다른 내일을 만들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갖고 있으니까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되 포기하지 않고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한 마디였습니다.
김영수 S·논술 인문 대표강사 ysjad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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