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진화하는 혁신 스토리
美법인 상무 재량으로 거부…서울 본사서도 똑같은 반응
결정하면 '딴목소리' 없어…일사불란하게 質경영 추구
한국경제신문은 인간개발연구원, 세븐&파트너스와 함께 11일 서울 역삼동 르네상스호텔에서 ‘런 삼성 포럼-삼성은 어떻게 글로벌 초일류 기업이 됐나’를 개최했다. 신경영 20주년을 계기로 삼성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과정을 거쳐 세계 초일류가 됐는지, 그 성공 요인을 분석하기 위해서다.
이명우 한양대 교수, 유필화 성균관대 경영전문대학원장, 고창범 인하대 교수, 천주욱 창의력연구소 소장 등 7명의 삼성 출신 교수와 전문가가 △신경영과 성공DNA △관리 △인재 △경영혁신 △마케팅 등 7개 부문으로 나눠 강의했다.
#1. 1999년 월마트가 미국 최대 세일기간인 블랙프라이데이를 앞두고 DVD 50만대를 사겠다고 연락해왔다. 대당 가격은 109~119달러로 자체 판매가(199달러)에 못 미치지만 규모가 커 이익이 났다. 삼성전자 미국법인 가전영업 책임자이던 이명우 상무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월마트는 한국 본사와 접촉했지만 한국 본사에서도 같은 반응이 왔다. “이건희 회장이 질경영을 통해 일류 브랜드가 되겠다고 하고 있는데, 그런 싸구려 제품을 팔면 되겠느냐”는 게 삼성이 주문에 응하지 않은 이유였다.
#2. 1998년 삼성전자 미주법인의 과제 중 하나가 대형 양판점이던 서킷시티(Circuit City) 입점이었다. 그해 4월 가전영업 책임자가 된 이 상무는 현지 임원 5명과 서킷시티를 찾아갔다. 30분가량 브리핑이 끝나자 한 초급 간부가 모욕에 가까운 발언을 했다. “다시 오지 마라. 앉아 있는 시간조차 아깝다. 이 세상에서 당신들만 있는 제품 혹은 제일 싼 제품이 있으면 다시 오라”고 말했다. 대책 회의를 했다. “서킷시티와 거래하자고 가장 싼 제품을 만들 수 없다. 서킷시티의 경쟁사인 베스트바이와 전략적 제휴를 강화하자. 3년 안에 서킷시티가 스스로 찾아오도록 만들자”고 결론을 냈다. 목표보다 이른 1999년 말 서킷시티에서 연락이 왔다. “가장 싼 제품을 만들 수 없어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서킷시티 최고운영책임자(COO)가 찾아와 “잘못됐다.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이명우 한양대 경영대학 교수는 이날 ‘삼성의 지속성장 비결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기조특강을 통해 “삼성의 오늘을 만든 건 질경영”이라고 밝혔다. 1990년대 삼성전자 글로벌마케팅실 임원, 미주법인 가전사업 대표를 지낸 이 교수는 질경영이 어떻게 정착됐고, 이를 통해 삼성이 어떻게 초일류 기업이 됐는지를 본인의 경험과 함께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이 회장이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선언을 한 뒤 마케팅은 마케팅, 인사는 인사, 관리는 관리대로 어떻게 질경영을 구현할지를 무척 고민했다”며 “이 같은 고민이 모여 현재 삼성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1990년대 초까지 한국 대기업들은 매년 매출 위주의 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이 회장은 “양은 버려라. 질로 간다. 적자가 나면 내 재산을 넣겠다”고 선언했다. 이때부터 삼성 경영진은 매출이 아닌 이익 위주로 목표를 세웠다. 이익을 목표로 삼자 저가 제품을 버리고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고객을 대하는 태도도 회사 중심이 아닌 고객 중심으로 바뀌었다. 인사관리도 연공서열에서 벗어나 능력 위주 발탁 인사가 이뤄지기 시작했으며 회사 발전을 위한 종업원 제안제도가 자리잡았다.
평가 잣대를 양에서 질로 바꾸면서 이처럼 삼성 전체가 달라졌다는 게 이 교수의 평가다. 상무였던 자신이 월마트의 대규모 오더를 거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질경영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국내 1위가 목표였던 당시 한국 기업 풍토에서, 삼성은 신경영을 통해 계열사별로 ‘월드베스트’ 상품을 1개씩 만들자는 목표를 세웠다. 이같이 ‘1사1품’을 추진하면서 질경영은 정착됐다.
이 교수는 삼성의 또 다른 성공 요인으로 ‘한 방향으로 가는 조직’이었던 점을 꼽았다. 삼성과 소니의 액정표시장치(LCD) 합작사 S-LCD가 좋은 예다. 2004년 5월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S-LCD 창립식엔 소니에서 모두 36명의 임원이 왔다. 이는 회사 내부에 S-LCD 설립에 대한 반대가 많자 당시 의사결정을 했던 최고경영자(CEO)가 창립식에 모두 참석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삼성은 S-LCD 제안이 나온 뒤 바로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일사천리로 추진했다. 삼성에는 일단 결정되면 잡음 없이 밀어붙이는 유전자가 있다. 이 교수는 “삼성과 소니는 한 방향으로 가는 데서 차이가 났다”고 말을 맺었다.
김현석/배석준 기자 reali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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