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세상 놀래킨 혁신 실종…효율 앞세운 가이젠만 남아
임원들 자신이 잘 모르면 창의적 아이디어 거부
“제품 개발 엔지니어들은 5~10년 앞을 내다보며 시장을 분석하고 새로운 연구에 힘썼다. 그러나 임원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일본의 간판 전자업체 소니의 히트 상품인 비디오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PS)’을 개발한 구타라기 겐 소니 전 부사장(63·사진)이 10일 아사히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토로한 말이다. 1994년 첫 출시 후 지금까지 3억대 이상 판매된 PS는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워크맨과 더불어 소니의 혁신을 상징하는 제품 브랜드다. 구타라기는 세계 게임업계에서 ‘비디오 게임계의 구텐베르크’란 찬사를 받았다. 그런 그가 32년간 몸담았던 소니의 몰락 원인을 날카롭게 지적해 눈길을 끈다.
○“‘가이젠’만 있고 혁신은 없었다”
1975년 소니에 들어온 구타라기는 입사 초반 소니에 대해 ‘직원들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자유로운 공간’이었다고 표현했다. 그는 “브라운관 TV가 대세였던 1980년대에 소니 엔지니어들은 액정TV를 개발하고 있었으며, 회사에서도 연구재료비를 아낌없이 지원해 줬다”고 회상했다. 당시 일본 전자업계엔 “위험을 감수하고 진검승부를 거는 창업주들의 혁신정신도 살아있었다”고 덧붙였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소니가 관료화와 무사안일주의, 관행 중시 등 이른바 ‘대기업병(病)’에 걸리면서부터였다. 구타라기는 “소니 임원들이 단기적 성과에만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직원들에 대한 간섭이 심해졌다”며 “비용 절감을 이유로 아웃소싱을 지나치게 늘려 직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고 주장했다. “기존의 제조 공정을 효율화하는 ‘가이젠(改善)’은 있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혁신은 없었다”는 것이다.
구타라기가 PS의 첫 번째 버전인 PS1을 내놓았을 때였다. 소니 내부에선 “천하의 소니가 어떻게 한낱 오락기를 만들 수 있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다행히 오가 노리오 당시 소니 사장이 비디오 게임시장의 잠재 성장력을 내다보고 PS1의 출시를 전격 승인했다.
오가는 도쿄 필하모닉교향악단의 지휘자 출신이었다. 소니 창업자 이부카 마사루 회장이 과감하게 스카우트한 인물이었다. 구타라기와 오가는 하드웨어 기술과 예술적 감각이 결합했을 때 나오는 시너지 효과를 중시했다. 두 사람의 예상은 적중했고, PS 시리즈는 세계적인 인기 상품이 됐다.
○“개성과 용기 되찾아야 살아남는다”
구타라기는 PS 출시 이후 승승장구하며 2003년 소니의 전자사업 전략부문 부사장까지 올랐다. 하지만 2006년 내놓은 PS3가 경쟁사 닌텐도의 ‘위(Wii)’ 제품에 밀려 판매가 부진했다. 그의 사내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2005년 소니 사상 최초의 외국인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한 하워드 스트링거와도 심한 갈등을 겪었다. 결국 구타라기는 2007년 소니를 떠났다.
구타라기는 “소니를 비롯한 일본 전자기업들이 부활하려면 직원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위험 부담을 기꺼이 감수하는 용기를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모든 혁신은 처음 탄생될 때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며 “대단한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내에서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불우한 인재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니는 2011회계연도(2011년 4월~2012년 3월)까지 4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2012회계연도 1~3분기에도 순손실이 508억엔에 달했다. 지난해 11월 신용평가사 피치는 소니의 신용등급을 투자 부적격인 ‘BB-’로 낮추고 전망도 ‘부정적’이라고 평가했다. 구타라기가 지적했듯이 극한의 체질개선 없이는 소니가 부활하기 어렵다는 게 강등의 주된 이유였다. 실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작년 3월 CEO직을 내놓았던 스트링거는 지난 8일 “오는 6월 소니 이사회 의장직에서도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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