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인기 웹툰 '미생' 윤태호 작가 - 대우인터 상사맨들 생생 토크

입력 2013-02-17 16:16
수정 2013-02-18 00:22
"상사맨? 상상 못하는 것에서 성과 거두는 모험가죠"

한 건의 수출계약 맺기까지 밤낮없이 뛴 상사맨 눈물 있어
인생 자체가 완성 아닌 '미생'…실패 극복위해 노력하는 것
마감 때는 늘 밤샘 작업…샐러리맨 애환 다루고 싶어



“상사맨이란 말에는 모험가적인 느낌이 있어. 농담처럼 말하지만 아프리카에 난로를 팔고, 알래스카에 냉장고를 파는, 누구도 상상 못하는 곳에서 뭔가를 성취해오는 느낌. 하지만 요즘은 그런 모험가적인 상사맨의 시대는 아냐. 요즘 사업은 이미 커진 회사의 힘으로 접근하고 결과를 만들어 내. 그래도 상사맨은 마지막 로망을 간직하고 있지.”

인기 웹툰《미생》76수에 나오는 대사. 종합상사 대리와 신입사원이 퇴근 후 소주 한 잔 기울이며 풀어 놓는 대화다. 실제 상사맨들은 어떤 로망을 품은 채 일하고 있을까. 대우인터내셔널의 상사맨 네 명이 지난 15일 서울역 앞 식당에서《미생》의 작가 윤태호 씨와 만나 그들의 일과 삶을 풀어놨다. 참석자는 입사 11년차인 이동현 과장(37·전력인프라본부), 6년차인 황지현 대리(30·냉연본부), 2년차 입사 동기인 김태은(26·철강원료본부) 한상엽 (29·기계플랜트 본부)사원. 만화 속 등장인물처럼 이들은 소주잔을 기울이며 진지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윤씨도 상사맨들의 살아 있는 스토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동현 과장=저는 태양전자 수출을 맡고 있는데《미생》을 보면서 많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작가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왜 상사맨을 다루셨나요.

▷윤태호 작가=처음에 기업 이야기를 그리려고 보니 수출 첨병으로 칭송받던 ‘정통 상사맨’들이 생각났어요. 윗사람들이 중동의 모래바람 속에서 멋있게 악수하며 계약서에 사인할 때, 이 장면을 위해 사무실에서 끊임 없는 전쟁을 벌인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컴퓨터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분들이 이 세계를 만들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거죠.

▷한상엽 사원=저는 플랜트사업팀에서 주인공 장그래와 비슷한 일을 합니다. 남아시아지역의 소각로 사업을 맡고 있는데 인프라 사업이라 국가 발주가 많아서 책임감이 커요. 만화에 ‘국가에 대한 고민이 상사맨의 근본’이라는 말이 나와요. 다른 회사보다 종합상사를 택하는 건 돈 때문이 아니라 내 아이템과 수완으로 국가적인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인 것 같아요. 사실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한 번도 일이 싫다거나 짜증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이 과장=팀장님이 좋은 분인가 보네요(웃음).

▷한 사원=사실 영업도 즐거워요.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관계로 사업을 풀어나갈 때 희열도 느낍니다. 최근 어떤 건설회사하고 거래하고 싶었는데, 그쪽은 우리 회사와 거래해도 되고 안 해도 돼요. 그래서 바쁘다는 분한테 점심에라도 꼭 만나자고 매달렸죠. 만나서는 낮부터 소주를 마시자고 했어요, 하하. 각각 세 병을 마셨죠. 그 정도면 저는 ‘훅’ 가는데 말이죠.

▷윤태호=세 병 마시면 누구나 훅 가요(웃음).

▷한 사원=결국 그분의 마음을 얻어서 관계가 더 좋아졌죠. 뿌듯했어요.

▷윤태호=저는 대기업은 항상 갑(甲)일 거라고 오해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네요.

▷황지현 대리=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항상 ‘우린 중소기업이다, 대기업이 아닌 을(乙)이다’는 마인드를 가지려고 해요. 실제로 중간에서 셀러에게도 을, 바이어에게도 을인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행동은 을처럼 하더라도 장사는 갑처럼 하는 것, 그게 상사맨의 매력인 것 같아요.

▷윤태호=천연자원이 없는 나라에서 상사 일을 하는 사람은 나라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죠. 요즘 자기가 하는 일을 ‘쿨’하게 가치 없이 여기는 젊은이들이 있는 것 같은데, 소비하는 사람들은 그 물건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줄 몰라도 제품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의식과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과장=작가님은 상사맨들 이야기를 어떻게 그리 잘 아십니까.

▷윤태호=처음엔 종합상사 쪽에 공식적으로 취재를 요청했는데, 전부 거절당했죠. 그래서 지인들을 통해 상사에 다니는 분들을 취재원으로 사귀었죠. 공식 취재를 거절당하길 다행인 것 같습니다. 그랬으면 회사 윗선에서 예의주시할 거고, 작품 그리기에 대단히 불편했을 거예요.

▷한 사원=그런데 제목은 왜 ‘미생’이죠.

▷윤태호=작품의 줄기는 장그래의 ‘아름다운 실패’예요. 아직 살아 있지 못한 ‘미생(未生)’이죠. 그런데 장그래처럼 실패하는 사람만 미생일까요. 인간은 ‘완생(完生)’을 결코 이룰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걸 지향해요. 원하는 걸 이뤘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다시 미생으로 돌아옵니다. 인간 자체가 미생이 아닌가 싶어요. 만화 속 어떤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던가요.

▷이 과장=보육원에 아이를 맡겨 놓고 퇴근을 못해 전전긍긍하는 여자 차장을 장그래가 도와주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여섯 살, 네 살 된 딸 둘을 키우다 보니 많이 공감하게 되더라고요.

▷김태은 사원=저도 그 에피소드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초등학교 내내 운 기억밖에 없어요. 저 역시 앞으로 아이를 낳고도 계속 일하고 싶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많이 돼요.

▷이 과장=만화 속 어떤 과장이 딸들 뒷모습을 보면서 술을 끊기로 다짐하는 장면도 가슴이 ‘찡’했어요. 사실 상사맨은 술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작품 속 오 과장이 항상 피곤에 절어서 퇴근해 간신히 아이를 보는 처지가 꼭 저 같았어요.

한창 대화를 나누던 오후 8시께. 한 사원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파키스탄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한 사원=이쪽에서 손님이 오시는데 조율할 게 있어서요. 해외 업무다 보니 이런 건 일상이죠, 뭐.

▷황 대리=KOTRA 도서관에 가면 각국 전화번호부가 있어요. 전 철강팀이니까 그 전화번호부에서 steel(철강)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업체의 전화번호를 몽땅 복사해서 전부 다 전화해 본 적도 있어요. 캄보디아 같은 곳에는 지사도 없고 이메일 주소도 없어서 접촉하기가 어렵거든요. 전화해서 ‘나는 철을 파는데 넌 철을 사니?’ 이렇게 영업하는 겁니다(웃음). 완전 텔레마케팅이에요.

▷이 과장=저는 베이징 주재원으로 4년 가 있다가 지난달에 돌아왔어요.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주재원은 사실상 직급이 두 단계 내려갑니다(웃음). 본사 과장이 주재원 부장에게 일을 시켜요. 주재원이 해당 지역 영업의 최전선이니까요.

▷황 대리=입사한 지 1년 반 지났을 때 110일 동안 어떤 개발도상국으로 장기 출장을 간 적도 있어요. 팀장님이 갑자기 그러는 거예요. ‘네가 그 나라를 뚫어봐라.’ 그 나라엔 지사도 사무실도 없을 때였죠. 가서 뭘 해야 하느냐고 물어보니 돌아오는 대답이 ‘네 맘대로 해라’예요. 그래서 제 맘대로 했어요(웃음). 집부터 구하고 컴퓨터랑 전화기 사다 놓고…. 공단을 하루에 서너 군데씩 계속 찾아다녔죠. 그때 거래를 시작한 업체들, 아직도 고정 고객사입니다. 지금은 주재원과 사무소도 생겼죠. 바쁘실 텐데 체력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윤태호=거의 못하죠. 1주일에 서너 번 자요. 월요일 밤새 마감하고 다음날 강의 나가고 약속 있고. 그러다 보면 수요일 새벽에 집에 들어가요. 수요일 하루 쉬고 목요일 다시 마감하고…. 아이들에게 어릴 때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못해주는 게 제일 미안해요. 가족여행을 가도 저는 빠지니까요. 애들이 신문이나 방송에서 아빠 나오면 대단한 일 하는 것처럼 응원해주니 고마울 뿐이죠.

▷황 대리=참, 사무실에서 서류 작업해주시는 여직원 분들이 ‘우리 업무도 꼭 넣어달라’고 작가님께 전해달래요. 저희 영업 직원은 판매에 치중하기 때문에 백업해주는 직원들이 중요한데, 그분들이 ‘우리 업무는 안 나온다’고 서운해하더라고요.

▷윤태호=그분들 이야기는 꼭 넣어야 할 것 같네요. 점심 때 시내에 나가보면 흰 와이셔츠 입은 ‘넥타이 부대’를 만나는데, 그들을 뭉뚱그려서 ‘샐러리맨’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각각의 삶과 가족이 있는 분들이잖아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세밀하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샐러리맨, 직장인들 개개인에게 색을 칠한다는 마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리를 파했을 땐 오후 9시가 가까운 시간. 상사맨들은 “오늘까지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며 다시 회사로 향했다.

김대훈/박한신 기자 daepun@hankyung.com

■윤태호 작가는

직장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웹툰 《미생》의 작가. 지난해 1월부터 프로 입단에 실패한 한국기원 연구생이 종합상사에 입사한 이야기를 다룬 《미생》을 연재하고 있다. 생생한 직장생활 묘사로 샐러리맨들의 큰 호응을 얻어 ‘2012 대한민국 콘텐츠대상 대통령상’을 받았다.

윤 작가는 만화계에서는 ‘허영만·이현세에 이어 윤태호의 시대를 열었다’는 평을 듣는다. 1988년 허영만·조운학의 문하생으로 만화계에 입문, 《비상착륙》을 월간 점프에 연재하면서 데뷔했다. 그 후《혼자사는 남편》《연씨별곡》《YAHOO》등을 발표했다. 2008년 발표한 스릴러 웹툰 《이끼》로 문화관광부 주최 대한민국만화대상 우수상, 부천만화대상 일반만화상을 받았다.《이끼》는 2010년 영화화돼 관객 350만명을 동원했다. ‘미생’ 후속작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소재로 한 일간지 연재만화와, 신안 보물선 도굴꾼을 소재로 한 웹툰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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