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난 뒤 도로에 車 세웠다 뒤에 오던 車에 부딪혀 날벼락
안전지대 대피 뒤로 미루고 사고 수습·신고전화 '강심장'
한 해 평균 280여건씩 발생…치사율 일반 사고의 5배
삼각대 설치 규정 대부분 몰라…'후진국형 사고' 악순환 계속
지난해 11월24일 새벽 4시8분. 이른 시간이었지만 영하 1도의 맑은 날씨였다. 광주광역시에 사는 박모씨(당시 45·여)는 강원도 군부대에서 근무하는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동생 두 명, 조카 김모씨(24)와 함께 자신의 차로 집을 나섰다. 경기도 안성시 경부고속도로 안성휴게소 부근에서 박씨는 가벼운 접촉사고를 냈다. 다급한 마음에 박씨는 자신의 차량과 상대차량의 피해 정도를 살피기 위해 잠시 차 밖으로 나와 도로 위에서 서성였다. 또 다른 사고차량 운전자 김모씨(당시 50)도 차를 도로 한가운데 세워둔 상태였다.
2분30여초 뒤. 서울을 향해 고속으로 달리던 현모씨(당시 50)의 K고속 고속버스는 도로에 서 있던 사고 승용차 두 대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박씨 승용차를 덮쳤다. 이 충격에 박씨 차량은 앞에 서 있던 김씨의 승용차를 들이받았다. 이 2차 사고로 단순접촉사고 차량 탑승자 5명이 모두 숨졌다. 당시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현장에서 사고 차량이 있음을 알리는 삼각대 등 기본적인 교통안전 용품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고속도로 등에서 가벼운 접촉사고나 타이어 펑크 등으로 차량을 주행도로 가운데 세워뒀다가 뒤에서 달려오는 차량과 추돌하는 ‘2차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1차 사고 후 차량을 서둘러 갓길로 옮기는 등 응급 후속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게 사고 원인이다. 2차 사고는 고속으로 달리던 후속 차량이 앞의 상황을 확인하지 못한 채 부딪히기 때문에 대개 대형참사로 이어진다. 일반 교통사고보다 사망률이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죽음을 부르는 2차 사고를 예방하려면 삼각대 설치 등 안전 조치가 필수다. 이 때문에 현행법은 고속도로에선 차량의 사고·고장 시 차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고, 사고 표시를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내 운전 경력이 얼마인데…’ ‘설마 나에게 사고가 일어날까’ 등 안이한 생각에 이 같은 기본적인 안전 수칙을 위반하다 생명까지 잃는 어이없는 사고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치사율 일반 사고의 5배
운전자들이 ‘기본’을 지키지 않아 발생하는 2차 사고는 매년 수백건씩 꾸준히 이어진다. 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고속도로 2차 사고는 2007~2011년 5년간 한 해 평균 280여건씩 발생했다. 같은 기간 2차 사고로 숨진 사람은 연간 평균 51명. 가장 최근인 2011년의 경우 고속도로 2차 사고 100건당 사망자 수는 11명(치사율 11%)에 달했다. 이는 일반 교통사고 사망률 2.4명보다 4.6배 많은 수치다.
2차 사고는 1차 사고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피해자들의 안이한 생각과 안전 의무 소홀로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2차 교통사고의 대표적인 사례로 14명이 목숨을 잃은 2010년 ‘인천대교 참사’ 때도 1차 사고 차량 운전자 김모씨(당시 45세·여)는 비상등만 켜 놓은 채 굽은 도로 위에 차량을 방치해 대형 사고를 유발했다. 교통안전공단 측은 2차 사고 피해자들의 유형을 분석한 결과 △사소한 접촉사고에 흥분해 도로 위에서 상대방과 잘잘못을 다투거나 △사고 발생 뒤에도 위험한 지점에 우두커니 서 있거나 △차량 견인 도중 안전 지점을 벗어나 있거나 △남이 낸 사고를 구경하다가 차에 치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2011년 9월20일에는 서울 강변북로 영동대교에서 성수대교 방면 3차로에서 고장난 차량이 있으니 우회하라는 수신호를 하던 유모씨(당시 54세)가 택시에 치여 숨진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A경찰서 교통과장은 “운전자들의 시야가 좁아지는 야간이었기 때문에 뒤따라오는 차들이 수신호를 인지할 것으로 기대하는 건 무리”라며 “안전 삼각대 설치 등 기본 수칙만 지켰어도 막을 수 있었던 사고였다”고 말했다.
○단속경찰도 모르는 ‘있으나 마나 한 법’
운전자들의 부주의와 무관심, 안전 의식 부족 탓에 2차 사고 예방 관련 법규는 있으나 마나 한 실정이다. 도로교통법 66조는 고속도로나 자동차전용도로에서 사고나 고장이 나면 가장 먼저 차량을 갓길로 빼내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킨 뒤, 차량 뒤쪽 100m 지점에 사고 차량이 있음을 알리는 삼각대 등 표지판을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야간 사고가 발생했을 땐 후방 500m 떨어진 지점에서도 식별할 수 있는 붉은색 ‘불꽃신호’나 섬광신호 등을 추가로 설치해야 한다. 안전 삼각대 휴대도 필수다. 그러나 실제론 이런 규정을 지키는 운전자들을 찾기 힘들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4만원(승용차 기준·승합차는 5만원)의 범칙금을 물린다는 사실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
시민교통안전협회가 지난해 고속도로 운전자 78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고속도로에서 긴급 상황시 안전 삼각대를 설치한 적 있느냐’는 질문에 ‘없다’는 응답자가 432명으로 전체의 절반을 넘었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대부분 자동차 제작사에서 신차 판매 때 삼각대를 제공하고 있지만 운전자의 무관심 등으로 자동차에 싣고 다니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밤엔 안전표지와 함께 적색의 섬광신호와 불꽃신호를 추가로 설치해야 한다는 규정은 아예 모르는 운전자들이 태반이다. 운전 경력 28년인 박진용 씨(54)는 “밤길 고속도로에서 타이어 펑크가 났을 때 갓길에 차를 대고 삼각대를 설치한 적은 있지만, 섬광신호나 불꽃신호도 설치해야 한다는 규정은 들어본 적이 없다”며 의아해했다. 경찰서 교통과 소속 경찰관들조차 ‘(고속도로 사고시) 후방 500m 지점에서 식별 가능한 불꽃신호를 설치해야 한다’는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을 제대로 모르는 게 현실이다.
○범칙금 4만원, 관대한 처벌이 사고 불러
전문가들은 “단속이 어려운 현실을 내세워 계도에 치중하기보다 안전을 위협하는 규칙 위반에 대해서는 경찰이 과감하고 철저하게 단속과 처벌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교통법규 위반자에 대한 처벌 수준이 너무 관대해 2차 사고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지적이다. ‘안전 운전 불이행’의 경우 한국은 범칙금이 4만원인 데 비해 미국 뉴욕주는 1차 위반자에게 최대 28만원, 2차 위반자 45만원, 3차 위반자 58만원의 범칙금을 물린다.
2차 사고 예방에 대해 보다 세부적인 가이드라인을 세워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기복 시민교통안전협회 회장은 “섬광신호나 불꽃신호의 경우 ‘500m 떨어진 지점에서도 식별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게 아니라 성능, 재질 등 정확한 규격을 제시해야 한다”며 “법에서 규정한 교통안전용품을 모두 구비한 운전자에겐 보험료 할인 혜택을 주는 등 법규를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관목 교통안전공단 교수는 “도로를 달리다 갑작스런 고장으로 차가 멈춰 설 때나 연료가 떨어져 멈췄을 경우, 운전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변 교통상황을 살피면서 갓길 등 안전한 장소로 차를 이동해야 한다”며 “고장 난 차량을 알리기 위해 도로 한가운데에 삼각대를 설치하는 건 뒤따라 오는 차량 때문에 위험하다”고 말했다. 삼각대 등 안전시설을 설치하고 경찰이나 보험사에 알리는 것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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