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질서자유주의 창시자 발터 오이켄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은 아버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철학교수였고, 어머니가 화가였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개방적이고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집안에서 성장했다. 예나대학과 본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가정에서 다양한 일반교양을 습득했다. 이것이 장차 교수로서 용기와 책임의식이 강한 인물이 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오이켄이 살았던 시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비롯해 동유럽과 옛 소련의 사회주의, 독일의 나치즘,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등으로 점철된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시기였다. 대학의 지식층은 독재자와 전체주의 시류에 영합하는 등 도덕적 파산이 만연했다. 18~19세기 습득했던 자유 유산은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조만간 망할 것이 틀림없는 나치정권 이후 독일이 지향해야 할 경제질서를 새로 창안했다. 이것이 독일 번영을 상징하는 ‘라인강의 기적’의 이론적 토대가 된 ‘질서자유주의’다.
그 사상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는 자유다. 이는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다. 자유 없이는 인간의 존엄성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라는 칸트의 절대윤리와도 상통한다. 오이켄은 전체주의의 폭정으로 잃어버린 자유에 대한 독일인들의 갈망을 대변했다.
흥미로운 것은 시장경제와 정부정책에 대한 비전이다. 그에게 자본주의는 자유와 번영의 원천이다. 자유기업 없이는 혁신도 없고 다양한 인간행동의 조정도 가능하지 않다. 시장경제는 가격 변화를 통해 경제적 상황 변동을 면밀하고 지속적으로 기록해 경제의 모든 부문들을 서로 조정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오이켄은 빈곤과 부의 격차는 자유를 제약하는 요인 때문에 생겨난다고 믿었다. 그런 요인을 제거해 경제자유를 확립하는 것이 빈곤을 해결하고 빈부의 격차를 줄이는 지름길이라고 역설했다. 자유가 많을수록 빈곤층도 줄어들고 소득도 높아진다고 확신했다. 시장경제와 경쟁만이 정치적 권력이든, 사적 권력이든 권력을 분산시키고 권력을 억제하는 불가피한 장치라는 것도 강조한다. 이런 시장경제 비전은 집단주의와 역사학파가 지배하고 있던 독일에서는 혁명적 발상이었다.
오이켄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질서정책’이라는 아주 새로운 정책비전을 제시한다. 그것은 시장참여자들이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는 법적 틀(질서)을 마련하는 정책을 의미한다. 이는 사적소유, 책임, 계약의 자유, 열린 시장, 건전한 통화 등 ‘시장경제 원칙’에 따르는 정책이다. 이런 정책을 통한 법질서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시장경제가 자유와 번영을 보장한다. 질서정책과 엄격히 구분되는 ‘과정정책’은 정부가 복지, 투자, 분배, 고용 등과 같은 국가의 특정한 목표를 위해 사안별로 시장 과정에 개입해 자유를 침해하는 간섭주의다. 오이켄은 그런 간섭은 빈곤과 실업이라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한다고 경고한다.
흥미로운 것은 오이켄의 역사관이다. 19세기 이래 자본주의는 봉건시대의 억압적인 신분사회로부터 해방시켜 개인의 삶을 개선했고 삶의 기회도 확대했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에는 결함이 있다고 지적한다. 독점과 담합의 형태로 사적 권력이 등장해 이것이 자유를 억압하고 소득과 부의 분배 격차를 심화시켰다는 것이다. 주목을 끄는 것은 사적 권력의 생성 원인이다.
오이켄은 사적 권력의 형성을 법적으로 인정하거나 지원하는 등 정부의 잘못도 컸지만 정부의 개입이 없었다고 해도 경쟁을 제한하는 독점과 담합이 필연적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시장경제는 정부의 도움 없이는 자생적으로 자유경쟁이 확립될 수 없고 그래서 경쟁질서의 확립은 국가의 중요한 과제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는 정부의 필요한 규제는 엄격히 소극적이고 사후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어쨌든 그의 질서자유주의는 별도의 독점금지 정책이 필요하지 않다고 강조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다르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독점과 담합의 문제는 지속적인 국가의 시장 개입에서 야기된 산물이라고 말하면서 기업의 시장 진입에 법적 장애물이 없으면 사적 권력은 문제될 게 없다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신(新) 경제사학의 인식 결과도 고전적 자유주의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경쟁을 촉진하고 소비자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도입한 대기업 규제는 자유경쟁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적인 기업 활동의 발목 잡기라고 한다.
오이켄이 정부를 바라보는 관점도 흥미롭다. 그는 ‘강한’ 그리고 ‘제한된’ 정부를 강조한다. 한편으로 정부는 사적 권력의 남용으로부터 자유경쟁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이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이익단체의 요구를 물리칠 만큼 정부는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부는 개인과 기업의 자유를 위협하기 때문에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이를 제한해야 한다. 이를 인식한 오이켄은 시장경제원칙으로 정부행동을 구속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부가 그 원칙에서 벗어나 정치적 이해에 따라 사안별로 개입하면 정부는 지대추구의 먹잇감이 돼 그의 권위와 신뢰를 잃고 이익단체의 노리개가 된다고 경고했다.
이 같은 오이켄의 경제사상은 독일에서 당시 무시됐던 이론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유와 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경제학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민경국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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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켄 사상의 힘 - '라인강의 기적' 일으킨 이론적 토대
발터 오이켄이 살던 시기는 정치적으로 집단주의가, 인식론적으로는 역사주의, 실증주의가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대안으로 세상에 내놓은 것이 질서자유주의다. 그는 독일이 직면하고 있던 갖가지 경제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할 수 없는 역사주의의 무능함을 개탄했다. 그래서 그는 역사학파와 결별하고 시장이론의 중요성을 인식한 나머지 이론 개발에 진력했다.
거대담론가였던 오이켄은 1940년대 초부터 독일 사회가 나아갈 길을 이론적, 정책적으로 모색했다. 그는 비밀리에 교수 및 대학원생들과 함께 법과 경제 그리고 질서사상과 관련해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열었다. 이 세미나 소식이 암암리에 알려지자 독일 전 지역에서 참석자들이 몰려왔다. 그러나 나치즘 비밀경찰의 수색과 압수, 감금 등으로 세미나를 지속하지 못했다.
나치즘이 끝나자 초미의 관심은 독일 사회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한 문제였다. 정치권과 사회 전체가 분열돼 방황했다. 독일 사회가 갈 방향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한 오이켄의 질서사상은 독일 사회의 혼란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프라이부르크학파’를 조직해 독일 경제를 친자유시장으로 개조하기 위한 운동의 전방에 서서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당시 자유주의자였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경제장관이 됐고 오이켄은 그의 자문위원이 돼 독일 개혁에 착수했다. 통화개혁과 중앙은행의 독립, 가격규제 철폐 등에서 그의 이상을 성공적으로 추진해갔다.
그러나 그는 1950년 호텔 방에서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자유주의의 구심점을 잃은 것이다. 애석한 것은 독일 경제가 그의 사상을 기반으로 해 전대미문의 번영을 누렸음에도 그가 이를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오늘날 독일 자유주의 경제학의 구심점이 돼 생생히 살아 있다. 그것은 제도적 틀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는 질서정책의 르네상스를 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독일 고유한 경제학으로서 프라이부르크학파의 ‘질서경제학’으로 발전해 시카고학파나 오스트리아학파와 경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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