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할인점, 백화점 등 집안 씀씀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대부분의 업종에서 신용카드 무이자 할부 서비스가 중단되면서 카드회원들의 불만이 폭증하고 있다. 일시불로 구입하기 부담스러운 고가의 물건을 구입할 때 요긴하게 이용해왔던 무이자 할부 서비스가 이렇다할 사전 공지도 없이 갑작스럽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카드업계에 따르면 신한카드, KB국민카드, 삼성카드, 현대카드 등 거의 모든 카드회사들은 올초부터 이마트 등 대형 유통회사와 항공회사, 온라인 쇼핑몰, 보험회사 등에서 무이자 할부 서비스를 전격 중단했다. 무이자 할부 서비스를 받을 수 없게 된 카드회원들은 크게 반발했다. 지난 주말 서울 영등포역 인근의 대형 할인점에서 물건값을 치르면서 무이자 할부를 이용하려했다가 거절당한 김모씨도 불편을 겪었다. 김씨는 “무이자 할부 서비스를 믿고 구매에 나섰다가 불가능하는 말을 듣고 계획했던 가전제품을 사지 않았다”며 “나 같은 일을 당한 사람들 가운데는 무이자 할부 중단에 항의하면서 판매직원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 새 여신전문금융법 뭐길래?
카드사들이 소비자들의 불만을 외면하면서까지 무이자 할부 서비스를 중단한 이유는 뭘까. 단순히 원가절감을 통한 수익증대 때문만은 아니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지난해 12월22일부터 적용된 새 여신전문금융법 영향이 절대적이다. 새로운 여전법은 신용카드 시장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도대체 어떤 조항들이 담겨 있길래 무이자 할부 중단 사태까지 초래했나.
새 여전법의 핵심은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율 차별 금지다. 가맹점이란 신용카드회사와 계약을 맺고 물건값을 현금 대신 카드로 받을 수 있게 된 상점을 일컫는 말이고 가맹점 수수료는 가맹점들이 카드결제 시스템을 제공받는 대가로 카드회사에 주는 돈이다. 여전법이 바뀌기 전까지 카드사들은 이마트, 롯데백화점처럼 카드결제금액이 1000억원을 넘는 대형 가맹점에는 낮은 수수료를 적용하고 골목상권의 조그마한 음식점이나 미용실 등의 수수료는 높게 책정해왔다.
실제로 대형 가맹점의 수수료율은 물건값의 1.5%에 불과했지만 안경점, 미용실, 음식점 등 소상공인들이 주로 종사하는 업종의 경우 최대 4% 안팎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대형 가맹점인 이마트가 100만원어치의 상품을 팔고 카드를 받았다면 카드회사에 수수료로 1만5000원을 줬지만 소규모 식당이 100만원어치의 음식을 팔았을 때는 4만원에 가까운 수수료를 내야 했던 것이다. 카드사들은 이에 대해 카드결제금액이 많아 매출을 크게 늘려주는 가맹점에 더 저렴한 수수료를 주는 것은 시장에서 흔히 벌어지는 매우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일반 식당들도 자주 찾아 음식을 많이 사먹어주는 단골들에게 가격을 깎아주지 않느냐는 것이다.
#카드 수수료 '빛과 그림자'
하지만 지금의 여전법은 카드사들이 자율적으로 카드 수수료율을 정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개정 여전법을 기초로 새로 마련된 가맹점 수수료 결정 체계에 따라 책정해야 한다. 소상공인들은 2011년 하반기부터 대규모 집회를 벌이면서 업종별로 차이가 큰 수수료율 체계를 개선해달라고 요구했고 국회의원들이 이를 수용해 법을 바꾼 결과다. 특별한 논리적 배경이 있다기보다는 경제가 어려워져 장사가 힘드니 카드 수수료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여전법이 도입되면서 소상공인들의 바람대로 중소 가맹점의 수수료율은 크게 떨어졌다. 연매출 2억원 이하의 가맹점은 1.5%의 수수료율을 적용받게 되는 등 90% 이상의 가맹점이 수수료 인하 혜택을 보게 됐다.
중소 가맹점 입장에서만 보면 여전법 개정의 결과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이다. 신용카드와 관련해 중소 가맹점 이외의 당사자들은 모두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수수료 체계 도입으로 카드업계가 연간 8700억원이 넘는 수수료 수입의 감소가 예상되는 것이나 중소 가맹점 수수료 인하와는 반대로 연간 최대 수백억원의 수수료 부담이 늘어나게 된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문제는 일반 소비자에게까지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왔다는 것이다.
#부가 서비스도 크게 줄여
대형 가맹점들은 수익감소가 우려되자 카드업계의 무이자 할부 서비스 비용 부담 요구에 난색을 표했다. 무이자 할부 서비스를 위해서는 카드사와 대형 가맹점이 함께 소비자가 내야 할 이자의 일부를 대신 내야하는데 대형 가맹점이 반대하니 카드사로서도 무이자 할부 서비스 중단이라는 조치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가전제품을 무이자 할부로 사려고 했다가 대형 할인점에서 거절당한 김씨의 사연은 이렇게 만들어지게 됐다.
소비자 피해는 무이자 할부 서비스 중단뿐만 아니다. 카드사들은 카드사대로 예상되는 수익감소를 만회하기 위해 부가 서비스를 대폭 줄였다. 신용카드를 쓸 때 쌓아주는 포인트 적립률을 낮췄고 물건값을 할인해주는 조건도 까다롭게 고쳤다. 예를 들어 기존에는 신용카드를 한 달에 10만원만 써도 롯데월드 입장권 가격을 50% 할인해줬지만 앞으로는 30만원 이상 카드를 긁어야 롯데월드 입장권 가격을 깎아주게 됐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정해지지 않고 정부와 정치권이 개입한 결과가 소비자 피해로 나타난 것이다.
박종서 한국경제신문 기자 cosm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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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바뀐'여전법'…정부가 시장 가격을 정한다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여신전문금융업법 개정안이 통과된 지난해 2월27일. 이 자리에 참석했던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크게 우려를 표했다.
국내 금융정책을 총괄하는 김 위원장은 “정부가 가격을 정하는 사례는 지금껏 없었고 헌법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반대의견을 명확히 했다. 하지만 국회 법사위는 개정안 통과를 강행했고 얼마 뒤 국회 본회의까지 통과해 지난해 12월22일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새로 개정된 여신전문금융업법은 크게 두 가지를 담고 있는데 신용카드회사가 수수료율을 정할 때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정해야 하며 부당하게 가맹점 수수료율을 차별해서는 안된다(18조의 3 1항)고 규정했으며 영세한 중소 신용카드 가맹점에 대해서는 금융위가 정하는 우대 수수료율을 적용(18조의 3 3항)하도록 했다.
김 위원장이 특히 반발한 조항은 중소 가맹점 수수료율을 정부가 직접 정하도록 한 대목이다. 수수료는 일종의 가격인데 가격을 정부가 정하게 되면 시장질서를 훼손할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영세한 중소 가맹점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이들에게 얼마의 수수료율을 정할 것인지 과연 정부가 판단할 능력이 있는지도 문제지만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결정돼야 할 가격을 정부가 통제하게 되면 반드시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무이자 할부 서비스 중단과 카드 부가 서비스 축소가 대표적인 사례다. 정부가 중소 가맹점 기준을 1억2000만원에서 2억원으로 올리고 수수료율도 1.5%로 단일화하자 수수료 수입이 급감하게 된 카드사들이 마케팅 비용을 대폭 줄이면서 소비자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호주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호주 정부가 수수료율 통제에 직접 나서자 신용카드 연회비가 크게 오르고 무료 서비스가 유료로 전환되는 등 부작용이 발생해 소비자 피해가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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