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보험이야기] 아빠 떠난 빈자리, 다시 채워진 '희망'

입력 2013-01-06 10:14
보험 속 사람, 사랑 스토리


월드컵으로 온 세상이 축제였던 2002년 6월. 아버지의 끔찍한 사고 소식을 들었다. 정신없이 병원 중환자실로 달려갔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한 남자의 모습에 석고처럼 멈춰 버렸다. 얼굴이 퉁퉁 부어 오른 채 퍼런 멍 자국이 얼굴을 반쯤 덮고 있는 아버지였다. 퇴근길 건널목을 건너다 대형 관광버스에 부딪혀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아빠, 눈 좀 떠보세요. 막내딸 왔어요.” 의식을 잃은 아버지의 몸을 끌어안은 채 나는 억누를 수 없는 울음을 쏟아냈다. 눈물과 한숨 속에 아버지의 의식이 깨어나길 기도하며 “아빠! 들려? 들리면 눈 한 번 깜빡 해 봐. 아빠! 들려, 안 들려?” 아버지의 귀에 대고 중환자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지만 우리 가족이 바라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믿기지 않았지만 우리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언젠가는 깨어나실 것이라는 희망으로 기약없는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아버지 몸을 닦고 정성스레 간호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코 속에 끼운 관이 아버지의 생명줄 역할을 했다. 욕창이 나지 않도록 아버지의 몸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수건으로 닦다 보니 손목 인대가 늘어나기도 했다.

2004년 봄, 난 5월의 신부가 됐다. 예비 신랑과의 결혼을 마냥 미룰 수 없었다. 누구보다 막내딸의 결혼식을 축하해 주셨을 아버지의 손을 잡는 대신 신랑과 나란히 입장했다. 눈물을 삼키며 행진하는 순간 병상에 계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 막내 결혼 축하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가족의 소망도 체념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6년을 버티다 영원히 떠나셨다.

아버지의 투병생활과 죽음은 우리 가족에게 큰 빈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도 희망을 준 것은 어머니가 큰 맘먹고 가입한 교통재해보험. 어려운 형편 탓에 늘 ‘007가방’에 물건을 가득 넣고 장사를 했던 어머니는 ‘가방 아지매’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고생을 했지만 가족에게 더 큰 짐을 지울 순 없다는 생각으로 보험을 넣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보험에 가입한 지 3년 만에 사고를 당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 운명 앞에 나약했던 우리 가족. 더 쓰러지지 않게 손을 내밀어 준 보험의 손길이 살아갈 힘을 주었다.

‘또 하나의 가족처럼’ 따뜻한 마음을 선물해 준 그 때 보험 컨설턴트의 위로도 큰 힘이 됐다. 그 컨설턴트는 우리 어머니에겐 동생처럼, 우리 자매에겐 이모처럼 푸근하고 정겨웠다. 유달리 입덧이 심했던 임신기간에는 내게 친정 어머니와도 같았다. 병간호로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포항에서 경주까지 손수 과일을 챙겨와 격려하던 마음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아버지는 병상을 털고 일어나지 못했지만 고난을 겪은 사람은 더욱 단단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가족에게 큰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지금도 아버지를 떠나 보낸 여름날이면 병상에 누운 아버지의 뺨에 얼굴을 비비던 그 날의 포근한 온기가 전해져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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