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잡앤조이=남민영 기자]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에서 가장 긴박한 에피소드를 꼽으라고 하면, 많은 이가 인턴들이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PT) 시험을 보는 장면을 선택한다. 슬라이드 하단에 들어간 회사 로고의 픽셀이 깨져서, 화려한 액션 탓에 외려 전하려던 메시지는 기억이 안 나서 등의 이유로 고배를 마시는 만화 속 캐릭터의 모습이 어쩐지 남의 일 같지 않고 생생하다.
△ 브랜드 경험을 디자인하는 디지털 마케팅에이전시디하이브의 이사인 윤희경 씨
자신을 PT를 많이 경험한 직장인 정도로 불러 달라는 윤희경 씨는 '미생'의 PT 에피소드에 큰 도움을 준 숨겨진 조력자다. 오랜 시간 동안 홍보 전문가로 활동하며 다방면에서 쌓은 PT 경험을 윤태호 작가와 이야기한 것이 '미생'에 녹아들어 현실감을 살리는 좋은 윤활유가 됐다. 수업도 시험도 비즈니스도 모두 PT를 거쳐야 하는 시대. PT 잘하는 공식은 없어도 잘하는 비결 정도는 있지 않을까. 브랜드와 관련된 모든 경험을 디자인하는 광고·홍보 에이전시 디하이브의 이사로 있는 윤희경 씨를 직접 만나 비결을 물었다. 그녀의 대답에는 광고·홍보계의 꽃이라 불리는 뛰어난 AE(Account Executive)가 되는 방법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었다.
*AE :광고회사나 홍보대행사의 직원으로서 고객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한편, 고객사의 광고계획이나 홍보계획을 수립하고 광고나 홍보활동을 지휘하는 사람 (출처 : 한경 경제용어사전)
-요즘은 다중채널 시대라 다양한 방식으로 홍보나 광고를 하는데, 디하이브에서 정확히 어떤 일을 하고 있나.
SNS가 발달하는 등 미디어 환경이 급속도로 변하다 보니까 요즘의 홍보나 광고는 브랜드와 관련된 모든 경험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일에 가깝다. 특히 많은 전문가가 이제는 광고보다 브랜드 경험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소비자가 브랜드를 접하는 자사 SNS, 홈페이지 등의 온드 미디어(Owned Media) 나 그 밖의 매체들을통해 브랜드와 관련된 이야기를 만들고, 그것이 브랜드를 소비하는 경험이 되도록 하고 있다.
△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tvN 드라마 '미생'의 한장면.
인턴 장그래는 PT에서 슬리퍼를 파는 과제를 택한다 (사진제공=tvN)
-'미생'의 윤태호 작가가 인턴들의 PT 시험 장면을 그리기 위해 직접 윤희경 이사를 만났다고 들었다.
딱 그 장면을 위해서 만난 것이 아니라 '미생'이 회사가 배경인 이야기니까 오래 직장생활을 한 내가 자연스레 취재원을 자처했다. 홍보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했던 수많은 PT 경험들을 이야기하고, 인턴들이 정직원이 되기 위해 PT 시험을 보는 이야기들을 했었다. 내가 한 건 일반적인 이야기인데 그걸 스토리로 굉장히 근사하게 풀어내셨더라.(웃음)
-직업 특성상 미래의 광고주들 앞에서 PT를 많이 하다 보니까, 노하우가 엄청날 것 같다.
많은 경험이 있을 뿐이지, PT는 여전히 내게 쉬운 일은 아니다. 다만 이 분야에 20년 넘게 있다 보니 조금 알 거 같은 것들이 있다. 일단 슬라이드에 있는 걸 그대로 읽는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주니어 때는 슬라이드를 만들면 그걸 그대로 읽다시피 했었다. 근데 그건 좋은 PT가 아니다. PT는 하는 관점이 아니라 받는 관점에서 준비해야 한다.
-받는 관점에서 준비하는 PT란 어떤 것일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하는 PT는 듣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끔 첫인상을 사로잡아야 한다. 그 뒤에 이야기를 전달해야 효과적이다. 대게 PT는 수십 장의 슬라이드를 10분 혹은 그보다 짧은 시간 안에 말한다. 그러다 보니 슬라이드 하나마다 공을 들이는 건 일단 말도 안 되고 듣는 사람 귀에도 안 들어온다. 전체를 바라보면서 어디에 하이라이트 지점을 만들 것인가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그걸 생각하면서 장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요즘은 어디든 PT처럼 효과적으로 말하는 퍼포먼스를 강조하고, 직무에 상관없이 1인 마케터가 되길 바라는 것 같다.
요즘이 아니라 생각해보면 예전에도 그랬다. 장터에 있는 만담꾼만 하더라도 다 자기만의 스토리텔링이 있지 않나. 이야기를 통해서 나를 말하고, 제품을 말하고, 내가 하는 일을 말하는 건 어느 시대나 똑같은 것 같다. 이제는 매체가 다양해지다보니까 그게 그림으로, 노래로, 1인 방송으로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브랜딩이 필요한 시대인 거 같다. 모순적인 건 20년 넘게 브랜딩을 해왔는데, 요즘 내 고민이 나란 사람을 어떻게 브랜딩 할 것인가이다.(웃음)
-넓게는 마케터 좁게는 AE 등 광고나 홍보 분야 일을 꿈꾸는 사람도 정말 많아졌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아야 한다. 개인의 취향도 중요하지만, 이 직업은 내가 관심 있는 분야만 맡지는 않는다. 우리 회사만 봐도 GS칼텍스, 네스프레소, KCC 등의 브랜드 경험을 디자인하고 있는데, GS칼텍스 같은 경우는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에너지, 엔진오일 등 다소 전문적인 분야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보더라도 GS칼텍스에 대한 이야기들이나 브랜드 경험이 쉽게 다가올 수 있도록 나부터 늘 연구하게 된다. 호기심을 바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철저한 공부가 필수인 것 같다.
△ 베테랑을 넘어서 한 회사를 이끄는 리더지만,
아직도 공부해야 할 것이 많다고 윤희경 씨는 말한다.
-풍부한 아이디어 그리고 트렌드를 잘 파악하는 능력도 중요할 것 같다.
트렌드를 잘 읽고 열려있는 것도 매우 중요하고,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도 좋지만 좋은 결과물은 늘 아이디어에서만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한 두 번은 성공할 수 있지만 결국은 ‘백 투 더 베이직’이다. 어떤 브랜드에 대한 근사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려면 브랜드의 기본뿐만 아니라 그 브랜드가 속한 업계 전반까지 치열하게 공부해야 한다. 제품 브로슈어만 보면 아이디어나 브랜딩 역시 그 안에 갇힌다.
-계속해서 이야기를 강조하는데, AE에게 이야기를 잘 만드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중요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업계에 정말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워낙 가벼운 스낵 콘텐츠를 많이 소비하다 보니까 깊이가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정말 많이 없다. 어떤 한 브랜드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정말 좋은 스토리를 풀어낼 수 있는 사고 자체가 얇아지는 느낌이랄까. 만약 AE나 광고·홍보 분야의 일을 하고 싶다면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가 어떤 이야기를 최근에 하고 있는지 면밀히 살펴보면서 SNS나 홈페이지, 광고 등으로 하는 커뮤니케이션 방법들을 연구해봤으면 한다. 특히 최근에 상품을 파는 페이지에서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는 경향이 강하니까 이 지점을 살펴보는 것도 필수다.
-상품을 파는 페이지에서 뭐가 어떻게 달라진 것인가.
명품을 예로 들어보면 SNS 채널들이 단순히 홍보 수단이 아니라 아예 판매 채널이다. 굳이 패션쇼나 매장을 갈 필요가 없다. 인스타그램 라이브에서 중계되는 패션쇼를 보다가 구매 버튼만 누르면 해당 상품이 집으로 배송되는 시대인 것이다. 단순히 유통 시스템 혁신이 아니라 명품은 구하기 힘들다는 브랜드 경험을 뒤바꿔 놓았다.
-이런 흐름을 놓치면 안 되니까 늘 안테나를 세우고 사는 삶일 것 같다.
모든 걸 다 경험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사실 너무 어렵다.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트렌드를 읽으려고 노력하고 책도 많이 읽는다. 네스프레소 브랜딩을 할 때에도 커피와 관련된 모든 것을 공부했다. 커피콩이 몬순 기후의 해풍에 영향을 받으면 아로마 풍부해지는 걸 그때 알았다. 트렌드를 읽고 선도해야 하는 것이 스트레스지만, 그게 또 재밌어서 할 수 있는 일이다. 손발이 부지런해야 하는 피곤함은 있다. (웃음)
moonblue@hankyung.com
사진=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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