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의 청춘만찬]
[PROFILE]
2016.01~ 제8대 한국여성경제인협회 회장
2011.02 제4대 경상북도여성기업인협의회 회장
디젠 대표이사
효림하이포징 대표이사
효림정공 대표이사
1998~ 효림산업 대표이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문헌정보학 박사
[캠퍼스 잡앤조이=김예나 기자] 1998년 IMF 당시, 불혹의 나이로 여성 CEO의 불모지인 제조업 분야에 뛰어든 한무경 효림산업 대표. 그는 20년 만에 효림산업을 연매출 7000억원 규모의 중견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또 2016년부터는 한국여성경제인협회의 수장을 맡아 여성 기업인의 육성에도 앞장서고 있다.
한 대표는남들보다 늘 ‘반 발자국’ 앞선다. 시대가 변화하는 방향과 속도를 선제적으로 읽으면서도, 리스크가 큰 ‘한 발자국’보다 ‘반 발자국’ 만을 앞서 걸어온 것이 그의 성공 비결이다. 이처럼 시대의 장기적인 흐름을 읽고 전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창의력’과 ‘창조력’을 길러야 한다고 한 대표는 강조한다.
-어렸을 때부터 CEO의 DNA가 있었나.
“남들보다 항상 감각이 조금 빨랐다. 순발력이라고 할지, 눈치라고 할지. 여덟 명의 언니와 한 명의 오빠, 9남매중 막내인 까닭에 환경적으로 눈치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대가족이기 때문에 작은 사회집단과 마찬가지였다. 집이 항상 왁자지껄 하다 보니 가족끼리 대화를 할 때나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실마리를 풀어가야 할지를 알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수용하는 자세도 배웠다. 웬만하면 모든 것을 관대하게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다.”
-공부는 잘 했나.
“대구의 명문인 경북여고에 다니며 중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했는데, 여덟 자매 중에서는 공부를 제일 못 했다.(웃음) 어릴 적부터 우리 9남매의 스승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일제 때 일본에서 공부하셨고,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농업은행에 근무하셨다.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하셨고 교육에 대한 관심도 많으셔서 신문을 스크랩해 거기에 나오는 한문을 우리들이 외우게 하셨다. 일본에서 영어를 배우신 터라 발음이 좋지 않으셨음에도(웃음), 영어 공부를 안 한다고 우리를 호되게 야단치시곤 했다.”
-학창시절 꿈은 무엇이었나.
“대학 교수가 되고 싶었다.”
-문헌정보학을 전공한 이유는 무엇인가.
“고3 때 사과 알레르기 때문에 병원을 찾았는데, 원장 선생님께서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하고 싶냐’고 물으셨다. 아직 전공은 정하지 못 했지만 교수가 되고 싶다고 말씀 드렸더니 대학에서 신설하는 학과에 입학하면 교수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고 조언해주셨다. 찾아보니 당시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에 도서관학과가 신설된다기에 지원해 입학했다. 이후 문헌정보학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학사 졸업 후 석·박사 과정을 거쳐 정말로 모교에서 강의를 할 수 있게 됐다. 삶의 모든 순간에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을 이뤘는데, 사업의 길로 접어든 계기는 무엇이었나.
“20년간 강사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강사 생활을 하며 결혼도 했다. 20년쯤 일하다 학교 밖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무렵, 은행에 계시던 아버지가 제안을 하셨다. 자동차 부품 회사를 인수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1998년 IMF 당시라 기업들이 줄줄이 문을 닫을 때였지만 과감히 인수를 결정했다. 자동차 교환 주기가 10년이라고 하는데, 국민들에게 자동차가 보급된 이후 교환 주기가 다가오는 시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금 빨리 앞을 내다봤던 것 같다.”
-직업과 인생을 바꿀 선택이었는데,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당연하다. 그래서 1년 반 정도 강사 생활과 사업을 병행했다. 그런데 제조업 현장에서 근로자들이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봤다. 부끄러워졌다. 아버지들이 저렇게 힘들게 돈을 벌어 자식들을 가르치는데,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 강사 생활에 전념하지 않고 ‘투잡’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 뒀다.”
-아버지가 사업의 길로 인도했다. 신뢰를 많이 받았나보다.
“워낙 딸이 많은 집안이라 아버지께서 매우 엄격하셨다. 해가 지면 모두 집에 들어와 있어야 했고, 심지어 오빠가 있는 친구 집에는 놀러가지도 못 하게 하셨을 정도였다. 언니들도 공부를 잘 해 대학에 다녔지만, 대학 졸업과 동시에 모두 결혼을 했다. 그런데 나는 그게 싫었다. ‘왜 열심히 공부해놓고 바로 주부가 되지?’ 하는 생각이었다. 내 직업을 갖고 싶었고, 대학 졸업 후 결혼 대신 대학원 진학을 하겠다고 아버지께 말씀 드렸다. 아버지께서도 다른 딸들을 모두 시집보내고 남은 막내딸 하나는 늦게 시집 가도 괜찮겠다 싶으셨는지,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그래서 언니들과 다르게 사회생활을 하게 됐고, 믿고 사업도 제안을 해주신 것 같다.”
-제조업은 전공 분야와 전혀 다르다. 초창기 때 어려움은 없었나.
“기계, 제조업 쪽에는 문외한이어서 모든 것이 생소했다. 우선 기계용어집을 구매해 용어부터 공부했다. 또 부품이나 기계, 공정 등을 직접 그림으로 그려서 외웠다. 부품 이름과 그림들을 보고 내가 알아보기 쉽도록 익히고, 용어집에 없는 용어는 회사 직원들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또 창업 초기에는 들리는 모든 말을 노트에 기록해 이를 그대로 복습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여성 대표를 직원들이 불안해하지 않았는지.
“여성인데다 전공자도 아니었으니. 불안해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않나. 우리 직원들 뿐 아니라, 우리가 납품하는 쌍용자동차에서도 여성 대표에 대한 불안함이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혹독한 수업료도 냈다. 회사를 인수한 후 자동차에 달린 부품 중 하나가 ‘캠페인(campaign)’ 대상이라는 자동차 회사의 연락을 받았다. 캠페인이라기에 이벤트 정도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게 리콜을 의미하는 거였다. 공장이 있는 부품 뿐 아니라, 이미 선적된 부품, 고객의 차량에 들어간 것까지 전량을 회수해야 했다. 그 모든 과정들이 나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후 회사가 급격히 성장했다.
“내가 잘하기보단 시대의 흐름이었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의 자동차 교환 주기가 도래했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인수한 후 두 달 뒤에 공장을 주야 2교대로 풀가동할 정도로 바빠졌다.”
-기업을 경영하며 어려운 순간도 많았을 텐데.
“2009년 쌍용차 사태 때 쌍용자동차에 물건을 납품할 수 없어 반년 간 매출이 없었다. 매출은 없이 고정비가 계속 해서 나가다보니 적자로 돌아서면서 정말 힘들었다. 회사가 정상화되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때 국내 시장만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수출 활로를 찾았고, 2009년 첫 선적을 했다. 적은 금액이었지만 그래도 직원들에게 돌파구는 있겠다는 희망을 보여줄 수 있던 계기가 됐다. 그때부터 시작해 미국과 일본, 인도, 중국까지 수출을 이어가고 있다. ”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제8대 회장 취임식 모습. 사진=한국여성경제인협회 제공
-한국여성경제인협회 회장도 맡고 있다.
“2016년부터 협회를 이끌게 됐다. 협회는 '여성기업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해 설립된 유일한 법정단체다. 2007년 '여성기업종합지원센터'를 설립해 현재는 전국 17개 센터를 운영하며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와 창업보육, 여성기업 연구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협회는 어떤 일을 하나.
“우리나라 여성 기업들은 자금조달, 판로(영업)개척, 기술개발, 인력확보에서 어려움을 호소한다. 이에 여성기업의 자금과 판로를 지원하기 위해 여성기업 공공구매 홍보, 여성기업 확인제도, 여성가장 창업자금 사업을 운영한다. 또 기업인에게는 네트워크가 중요한데, 여성기업인은 남성기업인보다 네트워크가 부족하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여성 최고 경영자과정, 전국 여성CEO 경영연수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 여성 창업이 활성화되고 있다.
“센터가 매년 열고 있는 여성창업 경진대회 신청건수만 봐도 여성 창업 열기를 느낄 수 있다. 올해 933건이 접수돼 지난해 신청 건수인 400건보다 2배 이상 증가했다, 또 25억원 규모의 여성창업자금은 지난 6월 이미 마감될 정도로 여성 창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 여성 경제활동의 특징은 무엇인가.
“여성의 출산양육기에 경력 단절이 두드러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연령별 여성 고용률 추이를 보면 30~40대가 최저점인 ‘M자’ 형태다. 29세까지 여성 고용률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다가, 출산양육기인 30~34세에 최저점으로 하락한다.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에 지난해 센터에서는 기업의 프로젝트성 업무와 여성인력을 온라인상에서 매칭하는 온라인 플랫폼 ‘여성기업 일자리허브’를 런칭했다. 이 플랫폼은 일자리 매칭에서 경력증명서 발급 등 경력관리까지 제공하고 있다.”
-여성 기업 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여성 기업에 대한 기본적인 데이터가 있어야 하는데 축적된 데이터가 없어 정책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질 않고 있다. 여성 창업의 경우에도 여성의 창업 환경에 대한 통계와 분석이 필요한데, 이러한 데이터가 없다. 여성 기업과 여성 창업에 대한 통계를 모으는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 또 남성기업과 여성기업의 균형을 맞춰가야 한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여성 기업에 대한 지원책을 특별법으로 입법화하는 등 정부 지원책이 필요하다.”
-젊은이들에게 조언한다면.
“‘창의력’과 ‘창조력’을 길러야 한다. 큰 흐름 속에서 작은 흐름을 찾고, 단기간의 흐름을 볼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흐름을 보며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일을 찾아야 한다. 또 모든 환경을 고려해 연속적인 가능성과 알맞은 방향을 찾아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늘 남들과는 다르게 생각하는 방법을 고민했으면 한다.”
yena@hankyung.com
사진=서범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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