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에 빠진 청년들의 무일푼 세계여행기…“농촌은 기회의 땅이죠”

입력 2017-07-03 11:43
수정 2017-07-04 17:13

다큐멘터리 영화 <파밍 보이즈(Farming Boys)>의 세 주인공 유지황, 권두현, 김하석 인터뷰

[캠퍼스 잡앤조이=김예나 기자] 세 명의 청년들이 공원에 앉아 ‘대기업 취업’이라 외치며 빵 한 조각을 던지니 비둘기 떼들이 우르르 모여들어 빵을 먹기 위한 쟁탈전을 벌인다. 다른 쪽에 ‘공무원’을 외치며 빵을 던지자 이번에도 마찬가지. 이 때 한 명의 청년이 ‘농사’라고 외치며 열쇠 하나를 던졌더니 모여 있던 비둘기들이 ‘푸드득’ 소리를 내며 너도나도 도망쳐 날아가기 바쁘다. 그 청년은 말한다. “이게 우리나라 취업 시장의 현실이야.”



올해 서울시 공무원시험의 경쟁률은 86.2대 1,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대기업의 경쟁률은 많게는 100대 1에서 300대 1까지 치솟았다. 이를 뚫어야만 입사가 가능한 출구 없는 취업 시장에서 벗어나 경쟁률 0대 1의 농부로 태어난 청춘들이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파밍 보이즈(Farming Boys)>의 세 주인공 유지황(30) 씨, 권두현(29) 씨, 김하석(29) 씨의 이야기다. 세 사람은 ‘농업’이라는 공통분모 하나만으로 무일푼 농업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다. 지난 2013년 9월부터 12개국 35곳의 농장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꼬박 2년을 보낸 이야기를 담아 영화로 개봉했다.

<파밍 보이즈>가 농업 세계 일주에서 만난 농장들은 ‘우핑(WWOOFING, 유기 농장에서 노동을 제공하는 대신 농장주로부터 숙식을 제공받는 것)’이나 땅을 젊은이들에게 임대해주는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농장경영을 실천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통해 여행 자금을 모았고, 라오스 가나안 농장 학교에서 돼지를 돌보는 일을, 인도네시아의 배우는 농장에서 유기농 농사를, 인도에서 지속 가능한 농업을 배웠다.

유럽으로 떠난 이들은 전 세계에서 온 젊은 농부들과 살을 부딪치며 농업에 대한 꿈을 더욱 키웠다. 이탈리아에서는 심각한 환경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젊은 이탈리아인들의 농업 커뮤니티를 통해 환경 친화적인 일상을 경험했다. 벨기에에서는 농부와 소비자들이 어우러진 지역 농장을 지원하는 개인 네트워크를 만나 ‘유통 시스템’에 대한 생각을 확장했다. 또 지구를 살리는 유기농 농법으로 운영되는 농장에서 유기농업으로 농사를 하면 땅을 무료로 빌려주는 운영방침과 철학에 큰 영감을 받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여행지인 네덜란드에서는 온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농가에서 직접 양을 기르고 양젖으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판매하며, ‘힐링’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는 농가에서 농업에 대한 아이템을 구상했다.

정장을 입고 찍은 증명사진을 붙인 이력서는 한 번도 내보지 않았다는 이들. 그을린 피부와 농사 노하우로 완성한 자신들만의 ‘특별한 삽질 이력서’를 쓰고 있다는 <파밍 보이즈>의 주인공 유지황 씨와 권두현 씨를 직접 만났다.



△파밍 보이즈의 주인공 권두현 씨(왼쪽)와 유지황 씨. 사진= 이승재 기자

Q 농업 세계 일주를 다녀온 이후 2년여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어떻게들 지내고 있나요.

유지황(이하 지황) 2015년 9월 한국에 돌아와 직접 농사를 지어보려고 농업기술센터와 지자체들, 농장주 등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알아보고 다녔어요. 틈틈이 강연도 하고, 사회적 경제에 대한 공부도 꾸준히 했고요. 하지만 농촌에 아무런 기반 없이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우선 거주지가 문제였죠. 고민 끝에 저처럼 농사를 짓고 싶지만 기반이 없는 청년들을 위해 집을 짓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건축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서 배워보려고 건축가를 찾아갔는데, 선뜻 1000만 원을 투자해주셨어요. 농사를 짓고 싶어 하는 청년 20명을 인터뷰해 집 디자인을 완성하고 설계부터 못질, 용접까지 하나하나 직접 배웠어요. 생계비는 쉬는 날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해결했고요. 지난해 9월 진주에 드디어 ‘코부기’ 1호를 완성시켰어요. ‘코부기’는 ‘협동(coperation)’의 영어 첫 발음 ‘코’와 거북이가 합체된 말이에요. 현재는 코부기 2호를 짓고 있어요. 정부지원 사업에 선정됐고 건축 전문가도 투입됐죠.

권두현(이하 두현) 한국 돌아오자마자 본격적으로 부모님을 도와 경남 산청에서 농사를 짓고 있어요. 딸기 농사를 짓고 있는데, 작기가 끝나면 벼농사도 지어요. 처음에는 부모님과 농사 방식을 두고 갈등도 있었어요. 저는 과학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농사를 짓고 싶은데, 부모님은 평생 농사를 지어오신 분들이라 옛날 방식을 고수하시려고 했어요.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비닐하우스를 나눠 각자 농사를 지어보기로 했는데 제가 재배한 딸기의 수량이나 초세가 더 좋았어요. 이제는 부모님도 제 농사 실력을 인정해주시고 올해부턴 제가 전부 관리하고 있어요. 하반기부터는 딸기 재배하우스 5동, 모종 재배하우스 1동인 지금의 규모를 조금 더 늘릴 계획이에요. 후계농인 저는 행복한 축에 속한다고 생각해요.

함께 떠났던 하석이는 생활소비자 협동조합인 I-COOP 생협에 취직해 ‘자연드림’ 매장에서 매니저로 일하고 있어요. 우리 중 유일하게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죠. 농업 세계 일주를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결고리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고, 세계 일주를 하며 오랫동안 농사일을 한 경험을 살려 유기 농산품을 유통하는 회사에서 일하게 됐어요. 직장인이라 오늘 인터뷰에는 못 왔어요. 직장인이 그렇죠 뭐.(웃음)

Q 저는 제 주변에서 농사를 짓겠다는 또래를 본 적이 없어요. 다들 취업만을 바라보는데, 농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지황 제가 원래 하고 싶은 게 많아요. 대학 졸업반 즈음에는 기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국제단체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막상 봉사활동을 하고 그러다보니 저와는 안 맞더라고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뭘까 고민하다 농업 기술을 배워서 그걸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자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농자재를 배달하는 일을 했는데 농촌 마을에 가서 보니 청년이 없더라고요. 그 때 ‘이 곳이 노다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순히 농사를 짓는 것 뿐 아니라 마케팅, 홍보 등의 활동도 필요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일자리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죠. 그때 하석이랑 같이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하석이도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정하지 못 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꼬셨죠. ‘앞으로는 농사가 뜰거다’. ‘무조건 이슈가 되고 기회가 생길테니 우리가 먼저 앞서 나가 길을 닦고 있자’라고 말이죠.

두현 전 사실 농업에 관심이 없었어요. 어릴 때부터 농부인 부모를 보면서 ‘농사는 힘들고 고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오히려 기계에 관심이 많아 부산에 있는 한 대학의 공대에 입학했어요. 그런데 군대를 다녀온 뒤 복학하기 전에 고향에서 농사일을 돕게 됐는데, 가끔 도시에 있는 친구들을 농장으로 초대했더니 친구들이 직접 딸기를 따고 맛보며 즐거워하더라고요. 그 뒤로 후계농이 되기로 결심했고 경상대 원예학과로 편입했어요. 대학에서 이론을 배우고 나니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농업 현장이 궁금해지더라고요. 그 길로 농업 세계 일주를 결심하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 유학원을 찾았는데, 거기서 같은 목표를 가진 청년 2명을 소개받고 연락을 하게 됐어요. 실제로 만난 건 딱 한 번이었어요. 그 뒤로 필리핀에 3개월간 어학연수를 떠났는데, 하석이와 함께 호주에 있다는 지황이형의 연락을 받고 바로 날아갔어요. 딱 한 번 만나고 함께 세계 일주를 떠나게 됐다니.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인연이네요.



Q 세계 일주 이야기를 해주세요. 방문할 나라와 기간, 농장은 어떻게 정했나요.

지황 단순해요. 구글에 검색했어요. ‘생태 공동체’ ‘농업’ ‘농업 학교’ ‘오가닉’ ‘로컬푸드’ 같은 단어를 쳐서 검색되는 농장을 찾아갔어요. 초반에는 메일을 80군데 보냈는데 답장이 온 곳은 거의 없어요. 그 뒤론 그냥 무작정 찾아가서 비비적(?) 거렸어요. 우리는 농업을 배우고 싶으니 가르쳐 달라고 말이죠. 내쫓기기도 많이 내쫓겼어요. 어떤 곳은 ‘두 명이 잘 곳만 제공할 수 있다’고 하길래 ‘한 명은 아무데서나 자도 된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실제로 텐트를 치고 밖에서 잠도 많이 잤고요. 그런데 막상 시켜보시면 다들 저희를 엄청 좋아하셨죠. 저희가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 했거든요. 농장의 밀린 일을 몽땅 다 하고 사랑을 엄청 받았어요.(웃음)

두현 일한 기간은 간 농장마다 모두 달랐어요. 한 달 있던 곳도 있고, 2~3일만 머무르다 떠나기도 했죠.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건 노동착취다’라는 생각이 들거나, 우리가 생각하는 농업의 취지와 맞지 않는 곳은 하루 만에 미련 없이 떠나기도 했어요.

Q 영화를 보면 초반보다 후반에 영어 실력이 부쩍 늘었어요. 언어 문제로 어려움은 없었나요.

두현 저 필리핀에서 어학연수 3개월 하고 갔다니까요.(웃음) 진짜 기본 실력만 있었는데 저희가 쓰는 말들의 패턴이 비슷하다 보니 나중에는 점점 살이 붙어 정말 영어 실력이 부쩍 늘었어요. 영화를 보면 우리가 사람들의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은데, 사실 못 알아들은 말이 더 많아요. 영화가 만들어진 후 번역해주신 자막을 보고나서야 ‘아 저 때 저 말이 저렇게 좋은 뜻이었어?’라고 안 것도 있어요.(웃음)

지황 저희가 원래 리액션을 진짜 잘 하거든요. 영화 보면 고개 끄덕이며 다 알아듣는 것 같아요. 저희는 열심히 고개 끄덕이며 듣고 있는데 농장에 함께 머물렀던 다른 나라 친구들이 저희를 보고 엄청 웃더라고요. 저희 욕 하고 있는데 고개를 끄덕인다면서요.(웃음)

두현 그런데 정말 그 분들이 마음으로 이야기해주는 부분이 있어요. 이상하게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마음에 확 와 닿고 감동이 느껴지고 그렇더라고요.











Q 2년이란 시간을 함께 고생했어요. 세 사람의 호흡은 어땠나요

두현 영화 막바지에 하석이가 네덜란드 농장에서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스마일 어게인’이라는 자작곡을 불러요. 치열하게 싸웠던 우리 자신들에게 다시 웃자는 메시지를 보내는 거예요.(웃음) 제가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고집도 세서 지황이형이랑 정말 많이 싸웠어요. 형도 저랑 성격이 비슷하거든요. 하석이가 가운데서 중재하느라 고생을 좀 했죠.

지황 제가 욕심이 많아요. 이것 저것 하고 싶은 것도 많고요. 동생들이 잘 따라주면 좋겠는데 답답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하도 많은 걸 하려다보니 동생들이 힘들어했던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실제로 네팔에서 대판(?) 싸우고 ‘이럴 거면 다 때려쳐’하고 다 같이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지금 생각하니 아찔하네요. 한국에 와서 화해하고 다시 떠났어요.(웃음)



△다큐멘터리 영화 <파밍 보이즈> 스틸컷



Q 가장 기억에 남는 농장은 어느 곳이었나요.

두현 네덜란드의 사펜스트릭 농장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양을 키우고 양젖으로 아이스크림을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농장인데,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어요. 어느 날 사람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려고 모여 있는데 농장으로 차 한 대가 들어오는 거예요. 차에서 휠체어를 탄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내려 농장을 둘러보고 양들을 직접 만져보고 하더라고요. 그 농장은 정부에서 지정한 ‘케어팜’이었어요. 농장주는 자신의 시동생이 양들을 돌보며 우울증을 치료한 경험을 바탕으로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농장으로 초대해 양들과 소통할 수 있게 돕고 있었어요. 몸이 불편한 사람이나 마음이 지친 이들이 텃밭을 가꾸고 흙을 밟으면서 건강한 삶을 되찾는 케어팜을 직접 보니 참 인상적이었죠. 농장주의 마인드에 따라 농장이 참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Q 여행을 통해 외국 농부들에게 배운 마인드는 어떤 것인가요.

지황 벨기에의 ‘도메인 드 그룩스’ 농장 소유주 엘리자베스가 우리에게 ‘Pay back’라는 말을 했어요. “요즘 사람들은 가져가려고만 하고 자연은 신경도 안 쓴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말이었죠. 그 말을 여행 내내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었고 지금도 늘 되새기고 있어요. 사람들은 언제나 돈, 돈 하면서 도시에 빈 공간이 있으면 건물을 올릴 생각만 하지, 텃밭을 만들거나 후손들에게 물려줄 생각을 하지 않아요. 도시 뿐 아니라 시골도 마찬가지예요. 우린 항상 자연에게 돌려줘야 해요. 제가 ‘코부기’를 지으며 목조 주택으로 짓고 있는 이유도 나중에 그 집을 해체했을 때 자연으로 돌아가게끔 하기 위해서예요. ‘페이 백’이란 말은 농업에 국한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일상에서도 늘 인식하고 기억해야 하는 말 같아요.

두현 프랑스 사과 농장주께서 ‘농부는 항상 정직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아버지께서도 늘 하시던 말씀이었고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말인데, 가슴에 와 닿았어요. 땅이 크든 작든 건강한 밭을 만들어 달라, 땅을 해치지 말고 생명이 살 수 있는 비옥한 땅을 만들어 달라는 당부를 하셨죠. 실제 지금 농사를 지으며 그 말을 실천하려고 늘 노력합니다. 사실 농약을 전혀 안 쓰는 것은 현실적인 여건 상 힘든 부분이 있긴 해요. 하지만 제초제는 절대 사용하지 않아요. 농부로서 땅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욕심 부리지 않고 정직하고 우직하게 정성을 쏟으면, 그만큼 자라나는 식물들과 땅이 알아주는 것 같아요.

지황 벨기에 공동체 농장에서 만난 다른 나라의 젊은 농부들이 한 말도 기억에 남아요. 세월호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청년들이 일상에서 정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더라고요. 젊은이들이 관심을 갖고 무엇인가를 해야만 세상에 변한다는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회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고민하라는 뜻이었죠. 그 말을 듣고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으면 청년이나 농업 정책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Q 영화를 보면 외국에는 농사를 짓고 싶어 하는 청년들도 많고, 우핑을 하며 농업을 배우고 있는 청년들도 많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청년들은 왜 농사를 기피한다고 생각하나요.

두현 너무 힘들잖아요. 단순히 육체적으로 힘든 것도 있지만 농사를 지을 여건을 마련하기도 힘들어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땅을 임대할 수는 있지만 텃밭만 있다고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시설이 들어서야 하는데 투자비 자체가 너무 많이 들죠. 최근에는 농사를 짓겠다고 귀농하거나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고 젊은이들의 모임도 생겨나고는 있어요. 하지만 준비 과정에 시간과 돈이 많이 들고, 국가가 해주는 귀농귀촌 지원도 실질적으로 청년보다는 자식이 있거나 나이가 있는 어르신들이 우선순위다 보니 체계적으로 준비를 마친 후 시작할 수 있는 청년들이 많이 없어요. 농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수익 자체도 많지 않은데 열정만 가지고 시작할 수는 없잖아요. 젊은이들이 농촌에서 생활하는 것도 주민들, 특히 어른들과의 소통도 잘 돼야 하고 스타일도 맞아야 하거든요. 청년들에게 나라에서 지원금을 주기도 하는데 ‘돈을 줄테니 알아서 하라’는 것은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체계적인 지원이 있어야 해요.

지황 저희가 유럽에서 본 것도 그와 같아요. 농사를 지을 기반이 마련된 땅을 임대할 뿐 아니라 숙식, 지역 사회에의 적응 등을 모두 해결할 수 있도록 하죠. 청년들이 진입하기에 힘든 부분들이 분명히 있기에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마련해주고 시작하라고 해야 할 수 있지, 지원금만 주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독일은 아예 농부를 공공의 일자리로 운영해요. 농부가 되기 위해 7~8년 간 공부한 후 월급을 주며 농사를 짓게 하죠. 오랜 공부와 노력을 통해 농부가 되기 때문에 농업에 대한 철학과 사명감도 철저해요. 우리나라도 그런 의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전 농업은 ‘1차 산업’이 아니라 ‘0차 산업’이라고 생각해요. 삶의 가장 기본이기 때문이죠.

Q 농업에 대해 젊은이들이 가졌으면 하는 마음가짐은 무엇인가요.

두현 농업을 위해서 포기해야 할 부분들이 많아요. 일반 직장 생활처럼 필요한 것들이 모두 갖춰진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포기할 부분을 포기해야 해요. 돈을 보고 시작한다면 매우 힘들어요. 수익은 적지만 수확할 때의 만족감, 농촌에서 즐기는 생활의 여유, 몸은 고돼도 욕심을 버릴 수 있는 마인드가 있다면 농사를 통해 삶의 질이 나아질 수도 있죠.

지황 농부는 몸을 쓰는 노동자라는 인식이 있잖아요. 몸은 많이 힘들고 수익은 많지 않죠. 돈만 생각하면 농촌 생활이 지옥 같아질 수 있어요. 고정 수입이 없기 때문이죠. 돈을 자신만의 가치나 기준점으로 둔 사람은 농사를 지을 수 없을 거예요.

두현 저도 농사를 지으며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지만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에요. 물론 농사를 짓고 돈을 벌어서 장가도 가고, 집을 사는 것이 작은 꿈이긴 해도 그것만 생각했으면 지금까지 오기도 힘들었을 거예요. 전 농사를 통해 유럽에서 본 ‘케어팜’을 만들겠다는 확실한 목표와 저만의 기준점이 있기 때문에 몸이 힘들고 지쳐도 버틸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도전했으면 좋겠어요.



Q 앞으로 두 사람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지황 ‘코부기’를 통해 청년들의 주거 문제를 해결해야죠. 현재는 청소년 자율 학기제를 활용해 청소년들이 집을 직접 설계하고 지을 수 있는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어요. 앞으로는 청년 농부가 되고 싶은 친구들을 공개적으로 모집해서 그들을 위한 집 한 채를 짓는 프로젝트도 진행할 계획이에요. 물론 그 집은 무기한 임대 조건이고요. 장기적으로는 청년들이 모여서 재밌게 일할 수 있는 청년 공동체를 만들고 싶습니다. 나중에는 ‘코부기 촌’도 만들거고,이 모든 것들을 하려면 우선 돈을 벌어야겠죠.돈에 가치를 두지 말라고 했지만, 사실 제가 이루고 싶은 농업인의 꿈을 위해서는 현실적인 부분도 고려해야 하니까요. 지금은 이상과 현실의 중간 지점을 목표로 잡고 있어요.



두현 제일 우선은 딸기 농사를 잘 지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어요.돈을 잘 벌고 싶은 이유는 결국 앞으로 농사를 더욱 잘 짓기 위해서 입니다.잘 키운 딸기가 가격도 잘 받을 수 있으니, 딸기의 수익성을 높이는 농사 기법도 꾸준히 공부하고 익힐 거예요. 그렇게 번 돈으로는농업 세계 일주를 다니면서 본 외국의 농장과 같은 느낌의 농장을 만들 계획입니다. 농장을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힐링’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죠. ‘케어팜’처럼 농촌에 누구나 와서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을 만들거예요. 아직 이뤄지려면 한참 멀었고이상과 꿈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제 두 다리는 언제나 땅바닥에 붙어있을 겁니다.



yena@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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