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어게인 68?…프랑스 뒤흔드는 고등학생 시위

입력 2026-10-14 00:00
[르포] 어게인 68?…프랑스 뒤흔드는 고등학생 시위

프랑스 전역서 3주째 시위…대학생·학부모·교사·노조도 가세

재정난 속 기름값·생활비 급등에 불만 고조…시위 확산 조짐

대선 7개월 앞두고 정치 쟁점으로 부상



(파리=연합뉴스) 황윤정 특파원 = "우리가 반항하는 걸 원치 않았다면 랭보(반항 정신을 상징하는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를 공부하게 하지 말았어야지", "오, 마리안느(프랑스 공화국의 상징),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닥해도 너는 내가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하는구나"…



13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의 이탈리아 광장(Place d'Italie) 일대에는 오전부터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일부 학생들은 '랭보', '마리안느' 등 프랑스를 상징하는 인물 등을 활용해 현실을 풍자한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들고나왔다.

검은색 관 모형을 갖고 나온 이들도 있었다. 관 모형에는 열악한 교육 환경으로 인해 학생들의 미래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듯 '청년들'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만성적 교사 부족과 과밀한 교실, 낡은 학교 시설 등 교육 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온 프랑스 고등학생들의 분노가 정부의 대책 발표에도 가라앉지 않고 있다.

학생들을 비롯해 시위대는 이날 오후 이탈리아 광장을 출발해 파리 도심을 행진했다. 대학생, 학부모, 교사, 노동조합도 시위에 가세했다.

고등학교 생물학 교사인 밸러리(60) 씨는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고 우리는 학생들을 보호해야 하고, 지지해야 한다"면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정당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등학생 딸(16)과 함께 이날 시위에 나온 50대 남성은 "아이들은 그저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일 뿐"이라며 "(학교에) 지붕이 있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그저 평화롭게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게 유일한 요구 사항"이라고 했다.

지난달 21일 파리 남동부 교외의 한 고등학교에서 시작된 시위는 이달 6일 프랑스 전역에서 26만여명(경찰 추산)이 참여하는 규모로 커졌다.

프랑스 정부에 따르면 시위와 관련해 지금까지 6천800명 넘게 체포됐다. 이 가운데 86%가 18세 미만 미성년자다.



경찰의 과잉 진압 논란도 시위대의 분노를 키우고 있다.

유치원 교사인 마리-오드(48) 씨는 "정부는 구체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않은 채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압만 하고 있다"면서 "상대는 미성년자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친구들과 함께 나온 파리 13구 르 르부르 고등학교 학생(15)은 "최루가스 때문에 (시위 현장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면서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우려고 여기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3주째 프랑스 전역에서 이어지고 있는 학생 시위가 내년 대선을 앞두고 교육 문제를 넘어 더 광범위한 사회적 불만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고등학생들의 시위를 계기로 긴축 재정 등 정부 정책과 유가 급등에 따른 생활비 부담에 대한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오는 17일에는 생활비 상승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릴 예정이라고 AFP 통신은 전했다.

이날 시위에 참여한 프랑스 노동총동맹(CGT) 소속이기도 한 마리-오드 씨는 "사람들이 비싼 기름값, 팍팍한 생활비 등에 지쳐 있다"고 말했다.

온라인에는 유가 상승에 대응해 오는 17일 '노란 조끼' 시위와 유사한 집단행동을 촉구하는 글도 등장했다. 2018년 유류세 인상 방침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노란 조끼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며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전날 학생 시위와 관련해 "이는 시간과 협의, 토론, 존중이 필요한 사안들"이라며 시위대에 자제를 촉구하기도 했다.

Z세대(젠지) 고등학생들이 학교 앞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위에 나선 근본적인 배경에도 국가 재정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비상이 걸린 프랑스 정부가 대체 교사 3천명 긴급 투입 등 임시 대책을 내놨지만 국가 부채와 재정 적자 때문에 교육 예산을 대폭 늘리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총리는 지난 7일 대국민 연설에서 "청소년들의 분노는 무작정 생긴 것이 아니다"며 이달 말 1차 대책을 내놓겠다고 했다.

프랑스의 공공 부채는 3조5천억유로(약 5천260조원)로 국내총생산(GDP)의 120%에 육박한다. 재정 적자는 3년 연속 GDP 대비 5%를 넘었다. 올해는 5.4%에 달할 걸로 전망된다.

채권 시장도 요동치면서 프랑스 국채 10년물 금리는 5% 가까이로 20여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기도 했다.



이날 시위에는 스웨덴의 기후 활동가 그레타 툰베리도 참가했다. 파리 외곽 생드니의 한 학교 밖에서 학생들과 함께 선 툰베리는 "청년들이 논의에 포함되지 않고 있다"면서 "우리의 미래가 빼앗기고 있다"고 AFP 통신에 말했다.



최근 시위 현장엔 1968년 프랑스 사회를 뿌리째 뒤흔든 학생·노동자 투쟁, 이른바 '68혁명'을 언급한 플래카드가 등장하기도 했다. 당시 68혁명의 불을 댕긴 것도 전후 대학 교육의 부조리, 열악한 교육 환경 등에 대한 대학생들의 분노였다.

이날 시위에 '68'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들고나온 간호 실습생 바티스트(22) 씨는 "68년 5월은 프랑스에서 젊은이들에 의해 혁명이 일어났던 때"라면서 앞으로도 계속 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



대선을 약 7개월 앞두고 이번 학생 시위는 정치권 쟁점으로 부상했다.

학생들에 대한 지지를 강조해온 극좌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는 시위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대선 후보군 중 지지율 선두를 달리는 극우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의원은 앞서 "이것은 더 이상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아니다. 이는 전문가들이 조직하고 LFI 의원들이 지휘하는 폭동"이라고 주장했다.

yunzhe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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