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푸틴 경유딜, 유가 영향은…전문가 "물량 미약한 수준"
절대적 공급 규모 작고 시장 '제로섬' 우려도…"의미 있는 가격 변화 없을 것"
푸틴 '전략적 승리' 평가도…우크라 견제에 서방 분열 효과까지 기대
(서울=연합뉴스) 곽민서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9일(현지시간) 전격적인 '경유 거래'에 합의했지만, 이번 합의가 실제 유가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푸틴 대통령이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당장 성과 내기가 급한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합의를 끌어내며 '전략적 승리'를 거뒀다는 평가도 제기된다.
미 CNN 방송에 따르면 이날 미·러가 합의한 경유 공급 물량은 우선 이달 중 30만t, 내달 50만t 규모다.
이는 배럴로 환산하면 약 600만 배럴이다. 미국의 약 1.5일 치 경유 수요를 충당할 수 있는 양에 그친다고 CNN은 분석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에서 "러시아가 미국 및 세계 시장에 즉시 30만t 이상의 경유 연료를 공급하고, 11월 중 추가 50만t을, 그 직후엔 100만t을 공급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어 "러시아는 이후 자국 경유 정제시설 상태를 고려해 단기간 내에 300만t의 경유 연료를 추가로 공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러시아 경유 공급 물량은 총 480만t에 달한다.
그러나 이같이 러시아가 최대한 경유를 공급한다고 가정해도 역시 물량은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에너지 투자사 '피커링 에너지 파트너스'의 댄 피커링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이번 합의에 따른 공급 물량 증가 폭은 5∼6% 선에 그칠 수 있다"며 "세계 디젤 시장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CNN에 말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공급 물량을 통상 단위인 배럴이 아닌 톤 단위로 발표한 것도 "일반인이 보기에는 톤 단위로 표시한 숫자가 더 커 보이기 때문"이라며 "이는 시장의 판도를 바꿀 만한 조치라기보다 정치적 행위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 역시 이번 공급 물량이 하루 약 3천만 배럴에 달하는 글로벌 디젤 수요와 비교해 미미한 규모라고 지적했다.
리서치 회사 '클리어뷰 에너지 파트너스'의 케빈 북 상무이사는 러시아가 실제로 공급 약속을 이행한다는 전제하에 하루 평균 공급량이 10월 약 7만2천 배럴, 11월 12만4천 배럴, 이후 몇 달간 24만∼72만 배럴 선에 그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는 지난해 10∼12월 러시아의 하루 평균 디젤 수출량(80만 배럴)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시장 구조상으로도 이번 거래는 디젤 가격 안정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초당파 연구기관 에너지정책연구재단의 마이클 린치 연구원은 "미국이 러시아산 디젤을 들여온다는 건 기존 구매처들이 다른 공급처를 찾아야 한다는 뜻"이라며 "결국 가격은 현재 수준에 머물게 될 것"이라고 AP통신에 말했다.
이번 합의가 글로벌 공급량 자체를 늘리는 게 아니라, 기존 물량의 공급처를 돌려막는 데 그칠 수 있다는 의미다.
반면 러시아 입장에서 이번 거래는 상당한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러시아는 통상 경유를 농업용 연료로 활용하는데, 동절기에는 관련 수요가 확연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러시아로서는 계절적 연료 수급 상황을 활용해 미국에 작은 '외교적 당근'을 제공하면서 큰 전략적 실리를 챙길 수 있게 된 셈이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에너지 전략가 클레이턴 시글은 이번 합의가 하절기용 디젤 재고를 처분하려는 러시아에 "엄청난 이득"이 될 수 있다고 AP통신에 말했다.
나아가 러시아가 이번 거래를 지렛대 삼아 우크라이나의 자국 정유시설 공격을 막으려 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유라시아그룹의 에너지·기후·자원팀 소속 그레고리 브루 분석가는 CNN 인터뷰에서 "푸틴이 트럼프에게 '호의'를 베푸는 대가로 우크라이나가 정유시설 공격을 중단하길 기대하고 있다는 강한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동시에 러시아는 에너지 가격 안정이 급한 미국과 강력한 대러 에너지 제재를 이어가고자 하는 유럽 등 서방의 분열을 유도하는 전략적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다.
에드워드 피시먼 미국 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은 이번 합의는 "대서양 동맹 내부의 분열을 더욱 부추기려는 공허한 약속"이라며 "전형적인 푸틴의 방식"이라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실제로 공급 약속을 이행할 수 있을지에도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러시아 역시 최근 이어진 우크라이나의 정유시설 공격으로 내부 에너지난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휘발유에 비해 경유는 상대적으로 수출 여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러시아 내 생산 차질을 고려할 때 추가 공급은 쉽지 않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현재 러시아의 정유시설 가동률은 약 60%에 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에너지 분석업체 케이플러의 미셸 브루하드 정책·지정학적 위험 부문 국장은 "이번 합의에서 가장 궁금한 것은 디젤이 대체 어디에서 나올 것이냐는 점"이라며 "지금 러시아는 수출이 문제가 아니라, 정유시설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미국 정치권에서도 격앙된 반응이 나오고 있다. 대러 에너지 수출을 제한하는 '2026 린지 O. 그레이엄 대러시아·대이란 제재법이 초당적으로 가결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이번 거래가 성사되며 대러 제재가 사실상 빛이 바랜 탓이다.
미국 민주당 상원 지도부는 "이번 결정은 트럼프 자신의 정치적 활로를 열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로 우크라이나와 우리의 동맹들을 팔아넘긴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디젤 가격도 여전히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이날 발표 직후 디젤 선물 가격은 소폭 하락했으나, 미국자동차협회(AAA)가 집계한 미국의 디젤 평균 소매 가격은 갤런당 6.28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달 22일 기록한 역대 최고치(6.52달러)에 근접한 수준이다.
mskwak@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