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그저 평화롭길 바라는 마음으로"…투표소 향한 러 시민들

입력 2026-09-19 08:11
[르포] "그저 평화롭길 바라는 마음으로"…투표소 향한 러 시민들

'우크라 사태' 후 첫 러시아 총선 현장 가보니…차분함 속 변화 갈망도

종이 투표 외에 전자·모바일 투표도…선거당국 "부정이 생길 수 없다"

일부 청년들은 "투표 안한다"며 정치 불신…첫날 투표율 30% 육박

크렘린, 푸틴 원격투표 장면 공개…푸틴 "이 선택이 틀림없다"며 클릭



(모스크바=연합뉴스) 김동호 특파원 = "미래에는 전쟁이 없길 바라는 마음이지, 전쟁이 없는 게 평화의 상징 아니겠어?"

18일(현지시간) 모스크바 도심 하모브니키 주택가의 한 투표소에서 만난 70대 여성 나탈리는 어떤 생각으로 투표했느냐는 질문에 "빵이 풍족하고, 푸른 하늘을 계속 볼 수 있고, 그저 평화롭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투표했다"며 이같이 답했다.

연합뉴스는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이른바 '특별군사작전'을 개시해 포화 속으로 빠져든 이후 처음으로 치르는 총선 현장을 찾았다.

모두 450석의 하원(국가두마) 의원을 선출하는 전국 단위 선거지만, 선거 열기가 아주 뜨겁게 느껴지진 않았다. 기자가 전날부터 도심 한복판인 트베르스코이를 비롯해 다닐로프스키, 로모노소프스키 등 모스크바 여러 지역을 다녀봤지만, 대로변 광고판이나 버스정류장 같은 곳들에도 총선 공보보다는 일반 광고가 훨씬 더 많이 눈에 띄었다.

유세차와 확성기를 동원해 시끌벅적한 선거운동을 벌이는 한국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5년 만의 대형 정치 이벤트가 치러지는 것치고는 조용하고 차분해 보일 정도였다.



주민들을 붙잡고 물어본 끝에 한 투표소를 찾아 들어가고서야 비로소 선거가 진행 중이란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학교 건물 1층 복도에 마련된 이 투표소에는 종이 기표소와 기표함이 각각 2개, 전자 투표기가 3대 배치됐다. "예전에는 기표소에 가림막을 쳤는데, 요즘 전자투표가 활성화되면서 종이 기표소 형태가 커튼 없이 간소화됐다"는 설명이 따라왔다.

사무원 안나는 기자에게 투명한 재질의 각종 투표함, 후보자 및 정당명부 투표용지, 온라인투표 정보가 모이는 전자기기 등을 일일이 소개하며 "부정이 생길 수가 없다"는 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한 노인 남성이 사무원의 안내를 받아 전자투표기로 향했다. 무인주문 키오스크처럼 생긴 기계 한편에 신분증을 스캔하니 곧바로 화면에 신분 정보가 조회됐고, 손가락을 갖다 대니 바로 의원 후보자와 정당을 고르는 화면으로 넘어갔다. 투표를 마치기까지 3분이 채 안 걸렸다.



다만 나이대가 높은 유권자들은 대체로 종이 투표용지를 선택했고, 젊은이일수록 전자투표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표소에 한참을 머물다가 투표를 마친 니콜라이는 말을 붙이는 기자의 손을 부여잡더니 "내가 이제 아흔살이다, 선거에 거는 거창한 희망이 뭐가 있겠나"라며 "지금도 괜찮은 삶이지만 내 자식들이, 내 손주들이 더 좋은 인생을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투표소 밖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좀 더 투박하거나 직설적인 표현으로 이번 선거에 대한 감정을 내비쳤다.

친구들과 함께 플류시하 거리를 걷던 의대생 다니엘은 "나는 투표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얼굴을 구기더니 "그냥 그러고 싶지가 않다"라고만 내뱉었다.



성바실리대성당 앞 붉은광장에서 마주친 대학생 에리카(19)는 "내일 모바일로 생애 첫 투표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 선거 환경이 편향적인 것 같다며 "변화를 원하지만, 선택의 폭이 좁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그의 친구 나스티야는 "그래도 많은 사람의 생각이 모이는 것이 미래를 위해 중요할 것 같다"며 어떤 입장이든 투표에 참여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러시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이날부터 20일까지 사흘간 이어지는 이번 총선 첫날 투표율은 29.75%를 기록했다. 모스크바는 24.37%로 평균보다 낮았다. 다만 주말인 19일부터는 투표소로 향하는 유권자가 더 많아질 전망이다.

크렘린궁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온라인으로 원격투표에 참여하는 모습을 언론에 공개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 선택이 틀림없다"라고 말하며 클릭을 마쳤고, 모니터 화면에 "투표가 성공적으로 완료됐다"는 알림이 떴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군사산업위원회 회의를 주재하면서 "우크라이나 지도부는 선거를 서두르지 않으면서, 우리를 방해하려고 한다"며 선거를 미루는 우크라이나와 계획대로 총선을 진행 중인 자국을 대비시켰다.

러시아는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대선과 총선을 모두 임기에 맞춰 치르고 있지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계엄령을 이유로 정해진 임기를 지나서도 계속 집권하고 있다고 비난한 것이다.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직접 현장 투표소를 찾았다.

집권 통합러시아당은 참관인단이 이날 선거 과정에서 투표 결과에 영향을 미칠만한 부정행위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우크라이나 접경지에서도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투표에 나섰다는 입장을 냈다.



d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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