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 틀어쥔 후티에 '고립무원' 사우디…이집트 구원투수 될까
양국 "항행 자유 공동 노력" 성명 냈지만, 이집트 적극 지원은 미지수
이집트, 수에즈 수익 반토막에 파병 압박…'예멘 트라우마'·'이란' 변수
(카이로=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글로벌 원유 수송의 핵심 동맥인 홍해 입구 바브엘만데브 해협이 사실상 예멘의 친이란 후티 반군 손에 넘어갔다.
정보 실패와 동맹군의 붕괴로 수년 만에 뼈아픈 타격을 입은 사우디아라비아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빠졌다. 가장 믿었던 동맹인 미국마저 직접적인 군사 개입에 선을 그으면서, 사우디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급히 이집트 카이로로 발길을 돌렸다.
이번 회담 직후 양국은 '홍해의 항행 자유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한다'는 원론적인 성명을 냈지만, 이집트가 직접적인 군사 개입에 나설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 무의미해진 美 안보 우산…'홍해 목줄' 쥔 후티와 다급해진 사우디
후티 반군의 바브엘만데브 해협 인근 장악은 사우디 안보 전략의 근본적인 맹점을 드러냈다.
10만 명에 달하는 후티 전투원이 결집하는 동안 사우디 연합군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며 최첨단 무기들마저 고스란히 적의 손에 넘겨줬다.
더 큰 충격은 서방의 반응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사우디의 공격 지원 요청을 거절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중동 전문가는 이를 두고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사우디-미국 동맹의 가장 뼈아픈 기각"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의 안보 공약에 금이 가면서 사우디는 전장에서는 밀리고 동맹으로부터는 외면받는 처지가 됐다.
선택지가 좁아진 빈 살만 왕세자가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을 찾아간 것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사우디 입장에서는 홍해를 맞대고 있는 역내 군사 강국이자, 과거 예멘 내전에서 자신들을 도왔던 이집트의 개입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 '수에즈 운하 생명줄' 얽힌 이집트…2015년의 데자뷔
사우디가 이집트에 구원의 손길을 뻗을 수 있는 가장 큰 명분은 바브엘만데브 해협이 이집트에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핵심 이익이라는 점이다.
이 해협은 이집트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수입원인 수에즈 운하로 들어가는 남쪽 관문이다. 가뜩이나 장기간의 외환위기에 시달리는 이집트는 최근 몇 년간 후티의 홍해 상선 공격 여파로 이미 수에즈 운하 수익이 반토막 나는 등 직격탄을 맞은 상태다.
사우디의 참전 요구를 단지 남의 일로 넘길 수 없는 이유다.
이집트는 실제로 2015년 예멘 내전 초기, 후티 반군이 해협을 위협하자 참전에 응한 적이 있다. 당시 시시 대통령은 해군 군함 4척을 홍해와 아덴만으로 급파해 해상 통제권을 장악하고 이란의 무기 밀수 루트를 차단했다.
이집트 공군 전투기도 사우디 연합군의 일원으로 후티 기지 폭격에 참여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이번 카이로 회동에서 후티의 위협은 사우디만의 문제가 아니라 수에즈 운하를 가진 이집트 국가 안보의 문제라는 논리로 2015년과 같은 해·공군 파병을 강력히 설득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 돈줄과 여론 사이의 딜레마…'예멘 트라우마'와 '이란' 변수
이집트와 사우디의 끈끈한 경제적 관계도 파병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사우디는 만성적인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이집트 시시 정권의 든든한 돈줄 역할을 해왔다. 막대한 차관과 중앙은행 예치금을 통해 구명줄을 내려준 사우디의 요청을 이집트가 단칼에 거절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예멘 땅에서 겪은 이집트의 끔찍한 트라우마, 이른바 '예멘의 덫'이다. 이집트는 1960년대 북예멘 내전 당시 수만 명의 지상군을 파병했다가 극심한 산악 게릴라전에 말려들어 막대한 전사자를 냈다.
현대사에서 '이집트판 베트남전'으로 불리는 최악의 실패다. 이 때문에 2015년 참전 당시에도 사우디의 거듭된 지상군 파병 요청을 끝내 거부하고 해·공군 지원으로만 선을 그었다.
여기에 후티 반군이 이스라엘에 맞서 '팔레스타인 연대'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도 엘시시 대통령의 발목을 잡는다.
반(反)이스라엘 정서가 팽배한 이집트 국내 여론을 고려할 때 후티를 직접 타격하는 것이 자칫 아랍 여론의 거센 역풍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중국의 중재로 이란과 관계를 복원하려 애써온 사우디, 그리고 이란과 관계 정상화를 모색해 온 이집트 모두 후티의 배후인 이란을 직접 자극하는 전면전은 피하고 싶어 한다는 점도 복잡한 외교적 딜레마다.
'강대국들의 무덤'으로 불리는 예멘에서 사면초가에 몰린 사우디와 복잡한 딜레마에 빠진 이집트. 두 중동 강국의 셈법이 꼬여가는 가운데 무소불위로 성장한 후티 반군의 홍해 패권 장악이 기정사실로 굳어질지 주목된다.
meola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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