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후티에 '포위'된 사우디, 최악 안보 위기

입력 2026-09-15 01:46
이란·후티에 '포위'된 사우디, 최악 안보 위기

호르무즈·홍해 위기에 핵심 송유관까지 피격, 석유 수출길 위태

파키스탄·튀르키예 방위협정도 방패막이 못돼…미국 지원도 난망



(카이로=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란과 그 대리 세력(프록시)들의 전방위적 공세에 최악의 안보 위기에 몰렸다.

역내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가운데 핵심 수출로마저 차단될 위기에 처했지만, 뾰족한 대응 카드마저 마땅치 않아 사우디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사우디는 현재 사상 최악의 악몽 같은 시나리오를 마주하고 있다.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對)이란 공격으로 촉발된 이란 전쟁의 여파로, 호르무즈 해협에서는 이란의 노골적인 통항 방해가 일상화된 상황.

여기에 이란의 대리 세력인 예멘 후티 반군은 홍해 남부 해상 통제력을 사실상 거머쥔 상태다.

지난 7월 사우디 선박에 대한 봉쇄를 선언하며 공세를 재개한 후티 반군은 이달 초 홍해 입구 바브엘만데브 해협 인근의 항구도시 모카와 근처 섬까지 잇달아 장악하며 사우디의 석유 수출길을 틀어막기 일보 직전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쪽에서는 이라크 내 친이란 민병대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드론 공격이 가해졌다.

지난 11일 사우디 메디나 남동쪽 알메사바에 위치한 핵심 인프라 '동서 송유관' 주요 가압장이 폭격으로 파손돼 향후 3~5주간 가동이 전면 또는 부분 중단될 처지다.



당초 사우디는 호르무즈 해협의 위기가 고조되자, 아라비아반도를 횡단해 홍해로 빠져나가는 총연장 1천200km, 하루 최대 700만 배럴 수송 규모의 동서 송유관을 대체 수출로로 활용해 왔다.

그러나 후티 반군이 홍해 남부 해상 통제력을 강화하고, 설상가상으로 드론 타격에 우회 송유관마저 멈춰 서면서 안전한 수출로가 사실상 모두 막혀버렸다.

실제 글로벌 무역 분석업체 케이플러(Kpler)에 따르면, 후티 반군의 공격 여파로 지난 6월 하루 340만 배럴이던 사우디의 아시아행 원유 수출량은 8월 12만 8천 배럴로 곤두박질쳤다.

후티 반군의 사우디 남부 지역 공격으로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추진해 온 경제 다각화와 '새로운 중동' 건설 구상에도 타격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우디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극히 제한적이다.

영국 싱크탱크 왕립국제문제연구소(채텀하우스)의 닐 퀼리엄 중동 전문가는 AP 통신에 "사우디는 예멘 분쟁에서 벗어나 경제 구조 변화에 집중하려 수년을 애썼으나 최근 후티의 진격으로 군사적 대응 압박이 커졌다"며 "하지만 현재 사우디가 택할 수 있는 모든 선택지는 막대한 비용과 불확실성을 수반한다"고 짚었다.

군사적 대응 수위를 높일 경우, 후티 반군의 거센 보복을 초래해 사우디 핵심 에너지 인프라가 잿더미가 될 위험이 크다.

글로벌 분쟁 모니터링 단체인 무장충돌위치사건자료프로젝트(ACLED)의 셰르완 힌드린 알리 중동 연구 책임자는 "군사적 대응은 분쟁을 장기화할 뿐"이라며 "과거와 달리 후티의 무기 체계는 고도화됐지만, 사우디는 그동안의 지속적인 방어전과 미·이란 전쟁 여파로 요격 미사일 재고가 바닥을 드러낸 상태"라고 진단했다.



외교적 타협 카드도 쉽지 않은 선택이다. 후티 반군이 요구하는 '사우디 주도의 봉쇄 해제'를 수용할 경우 장기적으로 적의 세력만 키워주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후티 반군의 배후로 지목된 이란 역시 미국으로부터 확실한 양보를 얻어내지 않는 한 지역 안정에 협조할 이유가 없다.

사우디가 안보 다변화를 위해 파키스탄, 튀르키예 등과 맺은 방위 협정도 실질적인 방패막이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들 협정은 주로 방위산업 협력, 무기 도입, 합동 훈련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같은 유사시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이 없다.

파키스탄은 만성적인 경제난과 함께 이란과의 국경 마찰 우려로 중동 분쟁 개입에 소극적이며, 튀르키예 역시 이란과의 복잡한 역내 역학관계를 고려할 때 사우디를 대신해 군사적 총대를 멜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평가다.



가장 큰 문제는 굳건했던 동맹 미국의 지원마저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중간 선거를 앞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표심을 의식해 중동 분쟁에 대한 추가 개입을 극도로 꺼리고 있다.

미국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는 최근 빈 살만 왕세자가 후티 반군에 대한 미군의 직접 타격을 요청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거절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더욱이 미군은 이미 호르무즈 해협 방어에 막대한 전력을 쏟아붓고 있어, 예멘 사태까지 챙길 군사적·정치적 여력이 부족한 실정이다.

마이클 래트니 전 주사우디 미국 대사는 "현 상황이 사우디 왕정에 엄청난 좌절감을 안겨주고 있다"며 "그들이 우려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하고 있으나, 백악관은 예멘 사태 개입에 전혀 열성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meolakim@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