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아일랜드의 멋진 복수

입력 2026-08-15 06:30
[율곡로] 아일랜드의 멋진 복수

800년 식민지 피해의식 벗고 영국보다 부유한 나라로

아일랜드에 克日의 길을 묻는다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아일랜드는 이웃 강국의 식민 지배로 고난을 겪은 나라의 대명사다. 1922년 독립 때까지 800년 가까이 영국 치하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 36년도 길었던 치욕의 세월인데, '800년 지배'로 통칭하는 오랜 굴종의 시간이 남겼을 고통과 상처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기간만 긴 게 아니라 식민 통치가 너무 가혹했다. 경제적 수탈은 도를 넘었고 법적 차별도 심했으며, 언어와 문화를 아예 지우려 했다. 직업, 교육, 종교의 자유조차 제한했고 심지어 군대를 동원한 대량 학살까지 있었다. 학계에서 아일랜드는 가장 극심한 차별과 반인륜적 대우를 장기간 받은 식민지로 평가된다.





특히 식민지 아일랜드인 대부분은 토지 재산권이 박탈돼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19세기 중반 대기근 때 무려 100만 명이나 굶어 죽은 건 흉작과 전염병 창궐에도 농작물 수탈을 계속했던 영국 정부의 비인간적 방침 탓이 컸다. 당시 아일랜드는 아사와 해외 대탈출로 인구가 4분의 1 가까이 감소했다. 이는 세계사에 없던 비극적 인구 붕괴로 기록됐다. 토착 언어(게일어) 역시 사실상 소멸했다.

이처럼 가혹한 탄압을 받았던 아일랜드가 영국을 미워한 건 당연한 일이다. 아일랜드인들은 독립 이후에도 오랫동안 반영(反英) 감정과 피해의식에만 매몰돼 있었다. 게다가 독립만 하면 잘 살 거란 막연한 믿음과 달리 1980년대 후반까지 60년 넘게 아일랜드는 서유럽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로 꼽혔다. 산업 기반이 없으니 인구 해외 유출도 계속됐다. 갈 곳 없던 원망과 증오는 영국을 향했으나 그런다고 사정이 나아질 리 없었다.

1980년대 후반 다행히도 아일랜드인들은 감정을 앞세워 남 탓만 해서 나아질 건 없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분노로는 빵을 못 만든다'는 현실 자각이었다. 아일랜드는 지정학적 숙적을 이길 만큼의 경제적 체급과 제도 기반을 먼저 갖춘 뒤에 '평평한 운동장'에서 과거사 문제를 다루는 순서로 극영(克英)의 길을 열기로 했다. 국가 부도 위기에 몰린 1987년 도출한 노사정 대타협이 시발점이다. 임금 인상을 자제하고 세금을 깎았는데, 특히 낮은 단일 법인세율 도입으로 친기업 환경을 조성한 건 신의 한 수였다. 글로벌 기업이 잇따라 몰려들자 서유럽 최빈국은 1990년대 후반 '켈틱 타이거'로 불리는 급성장을 거쳐 신흥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다.

콤플렉스를 떨친 아일랜드는 영국을 상대로 감정 대신 이성적인 접근을 했다. 북아일랜드 유혈 사태를 끝내기 위해 헌법에 명시된 '북아일랜드 영토 소유권'을 1998년 국민투표로 전격 포기하는 대승적 결단을 내렸다. 영국도 북아일랜드 자치권을 인정하며 평화가 찾아왔다. 2011년엔 영국 여왕이 독립 이후 최초로 아일랜드를 공식 방문해 아일랜드어로 인사하고 비극적 과거사에 유감을 표함으로써 양국은 대등한 위치에서 역사의 빚을 청산했다. 이 모든 일들은 아일랜드가 피해의식과 열등감을 버리지 못했다면 일어날 수 없었다.

이제 아일랜드는 거짓말처럼 옛 지배자 영국보다 잘 사는 나라가 됐다. 한때 세계 최강이었던 영국이 쇠락하는 사이에 기아에 시달렸던 소국 아일랜드는 눈부시게 도약했다. 아일랜드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이미 10만 달러를 돌파해 영국을 배 이상 압도했다. 착시를 피하고자 다국적 기업의 명목 이윤을 제외한 1인당 국민총소득(GNI)에서조차 아일랜드가 영국을 앞선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일랜드는 진정한 복수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줬다. 800년 식민지의 깊은 한을 반영 감정과 증오로 소비하는 대신 가해자보다 더 부유한 나라가 되는 것으로 해소했다. 과거에서 미래로, 패배자에서 승리자 마인드로, 피해의식 대신 자존감 회복으로 사고 패러다임을 전환했던 덕분이다. 이는 광복 81주년을 맞은 우리에게 '극일(克日)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져준다.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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