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 르포] "피의 복수를"…반미 애국집회로 변한 '세기의 장례식'
사회자 선창 따라 "미국에 죽음을"·"이스라엘에 죽음을" 사방서 구호
35도 무더위에도 새벽 5시부터 시민들 운집…울음 터뜨리는 추모객도
테헤란 시민 "하메네이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란의 생존과 같다"
'Kill Trump' 현수막에 내부 '반역자' 겨냥한 강경파 구호도 등장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기자 = "쿤 커 헤 라흐바리."(최고지도자를 위한 피의 복수를)
4일(현지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시작된 이란 전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의 장례식은 거대한 반미 애국 집회나 다름없었다.
추모객들은 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 "암살자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끊임없이 외쳤다.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세기의 이벤트'가 열린 테헤란 이맘호메이니 대(大) 모살라에 이란 시민들은 이날 새벽 5시께부터 모여들었다. 검은 옷을 갖춰 입은 추모객 수만명은 35도가 넘는 더위에도 모살라의 중앙광장을 지켰다.
모살라 중앙광장 앞에 높게 세워진 단상엔 이란 국기가 인쇄된 관이 5개 놓였다. 전쟁 첫날인 2월28일 미국·이스라엘의 폭격이 사망한 아야톨라 하메네이 본인과 그의 딸, 사위, 며느리의 관이었다. 나머지 관 1개는 특별히 작았는데, 사망 당시 생후 14개월이었던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외손녀였다.
장례 행사 진행자는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영웅성을 칭송하고 미국과 이스라엘이 얼마나 무도하고 잔인한 행동을 했는지를 규탄하는 내용의 연설을 다소 들뜨고 선동적 목소리로 이어갔다.
특히 진행자가 "아야톨라 하메네이와 그의 가족이 무방비로 사탄에게 잔인하고 억울하게 암살당했다"고 부르짖자, 추모객들은 "암살자에게 피의 죽음을"이라고 외치며 호응했다. 동시에 많은 이가 침통하고 분한 표정을 지으며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한 테헤란 시민은 연합뉴스에 "최고지도자는 단순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다"라며 "이란에서 그는 우리의 스승이며 어쩌면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어 그의 죽음에 사람들이 애통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눈물을 보인 또 다른 시민은 "최고지도자의 존재는 이란의 생존과 같다"며 "마치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느낀다"고 했다.
이란 당국은 이번 장례식을 통해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죽음을 시아파에서 가장 추앙하는 이맘 후세인의 비극적 서사에 겹치려는 의도를 명확히 드러냈다.
이맘 후세인은 7세기 말 수니파 우마이야 왕조에 맞서 이라크 카르발라에서 비극적으로 숨졌다. 우마이야 왕조에 비해 전력차가 비교할 수 없이 컸는데도, 이맘 후세인은 결사항전을 택해 수십발의 화살을 맞고 처참하게 사망했다. 카르발라 전투는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가 대결하게 된 결정적 장면이다.
이맘 후세인의 순교는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순교와 견줄 수 있을 만큼 시아파의 종교적 정체성을 설명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당시 전투에서 이맘 후세인의 가족도 몰살당했다.
장례식 사회자는 이맘 후세인의 가족처럼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무고한 가족도 적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했다며 애통해했고, 이에 추모객들은 자기 가슴을 내리치면서 "우리가 지키지 못했다. 복수를, 복수를"이라고 소리치면서 자책했다.
영어로 'Kill Trump'(트럼프를 죽이자)라고 쓴 현수막도 눈에 띄었다. '내 목숨 이란을 위해 희생하리라'라고 적힌 머리띠를 두른 시민도 많았다.
이날 행사에서는 일반적인 반미 집회와 달리 "마르그 발르 모나페그"라는 구호도 자주 들렸다.
'체제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죽음을'이라는 뜻으로 번역되는 이 구호는 직전까지 이어진 전쟁의 영향으로 보였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 체제를 붕괴하기 위해 전쟁을 했고 이에 동조하는 내부의 '반역자'를 겨냥한 강경파의 구호인 셈이다.
애초 이번 장례식은 시민들이 아야톨라 하메네이와 그의 가족의 관 앞을 천천히 지나며 추모하는 방식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론 다르게 진행됐다.
관이 있는 단상에서 약 50m 떨어진 곳에 검은 가벽이 반원 모양으로 세워져 시민들은 그 바깥쪽에서 관을 올려보며 각자의 방식으로 추모했다. 광장은 다시 가벽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뉘었는데 남녀 구역을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이란 당국은 모살라 주변 1.5㎞를 모두 봉쇄해 거리를 비우고 곳곳에 경찰과 무장병력을 세워 안전사고와 테러에 대비했다. 모살라로 가는 길 양옆엔 차가운 생수와 수박, 오이, 냉차 등을 무료로 나눠주는 자원봉사 부스가 줄지어 있었다. 모살라 광장과 도로 곳곳엔 물을 뿌리는 스프레이가 설치돼 폭염을 식혔다. 모살라 상공에 헬리콥터가 저공으로 순회 비행하면서 인파의 흐름과 수상한 움직임을 끊임없이 감시하기도 했다.
테헤란 시내 곳곳엔 대형 스피커가 설치돼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영웅적 순교'를 기리고 비극적 죽음을 애통해하는 내용의 노래인 '노헤'가 하루 종일 울려 퍼지고 있다.
hska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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