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후 10년 새 7번째 총리…혼란의 영국
양당 체제 흔들리고 우익 돌풍…차기 노동당 내각 과제 산적
스타머 사임, 공교롭게도 브렉시트 국민투표 10주년 하루 앞 발표
유력 차기 주자 버넘에 당내 기대감…'쇄신' 가능할지는 미지수
(런던=연합뉴스) 김지연 특파원 = 영국이 키어 스타머 총리의 사임 발표로 10년 새 7번째 총리를 맞이해야 하는 정치 혼란상을 이어 가고 있다.
스타머 총리는 하원 650석 가운데 412석을 휩쓰는 총선 압승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22일(현지시간) "국가를 쇄신해 완전한 변화를 가져오겠다"는 취임 일성을 냈던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사임하겠다"며 고개를 떨궜다.
스타머 총리의 사임 발표는 영국민이 유럽연합(EU) 탈퇴를 결정한 브렉시트 국민투표 10주년에 하루 앞서 나왔다. 2016년 6월 23일 국민투표에서 잔류 진영을 이끈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는 그 다음날 투표 결과에 책임을 지고 사임을 발표했다.
그 이후로 영국은 험난한 브렉시트 협상과 코로나19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에 따른 경제 부진과 물가 급등, 이민 급증, 국제 안보 불안을 겪으며 테리사 메이,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 리시 수낵 등 보수당 총리 4명을 더 거쳤다.
보수당 정권 심판론을 등에 업고 2024년 7월 출범한 스타머 총리의 노동당 정부도 극심한 정치·사회 분열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이날로 취임 717일 된 스타머 총리는 사임 발표로 고든 브라운(1천50일)의 기록을 깨고 역대 최단기 노동당 총리가 된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역대 영국 총리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1990년대 3천28일에 달했지만, 2020년대 들어선 500일도 되지 않는다.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분석한 여론조사 정당별 지지율에 따르면, EU 탈퇴 선봉에 섰던 나이절 패라지 대표의 우익 영국개혁당은 노동당 정권 초기인 지난해 초에 이미 노동당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현재는 영국개혁당 27%, 노동당 20%, 중도우파 제1야당 보수당 19%, 좌파 녹색당 13%, 중도 자유민주당 13%다.
보수당과 노동당이 각각 30∼40%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던 전통적인 양당 체제가 무너진 셈이다. 이는 지난 2년간 치러진 두 차례의 지방선거와 보궐선거에서 연이어 확인됐다.
노동당은 지지율 급락의 여러 원인 중에서도 스타머 총리 개인의 '역대급'으로 낮은 인기와 국정 및 당 의제 설정과 실행 능력 부족을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했다.
스타머 총리는 노동자 가정에서 나고 자라 글로벌 대기업과 맞선 인권 변호사 출신으로, 잉글랜드·웨일스 검찰 수장인 왕립검찰청(CPS) 청장을 지내며 왕실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는 정계에 진출해 2020년 노동당 당권을 잡은 이후로는 중도좌파 정당을 좀 더 오른쪽으로 이동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도주의, 실용주의 원칙을 내세워 2024년 정권 교체를 이끌었고 취임 이후엔 집권 2기를 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도 예상 밖의 브로맨스를 자랑하며 미국과 조기에 무역 합의를 이루고 유럽 주도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중재하는 등 외교 성과를 냈다.
총선에서 약속한 대로 이민도 대폭 줄였고, 브렉시트를 되돌리진 않으면서도 EU와 협력 강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명확한 국정 의제를 제시하지 못하고 강한 추진력 없이 갈팡질팡한다는 혹평이 이어졌다.
경제 활성화와 공공 재정 안정을 최우선으로 각종 복지 삭감 정책을 발표했다가 중도좌파의 색깔을 지우고 녹색당 등에 진보 유권자들을 빼앗겼다는 당내 거센 반발을 사자 대부분 철회했다.
근로자 증세를 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지키느라 기업, 부유층 증세를 추진하며 보수 진영과 경제계 반발을 샀다. 경제가 좀처럼 활성화하지 못하는 가운데 차입 비용이 치솟으면서 공공 재정을 강화하지 못해 국방비 증액 계획도 지연됐다.
미국 억만장자 성착취범 제프리 엡스틴과 친분이 깊은 피터 맨덜슨을 주미 대사에 임명했다 해임하는 과정에서 당내 좌파 진영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대로면 2029년 여름 치러질 차기 총선에서 실각이 뻔하다는 위기감에 노동당 의원들은 버티는 스타머 총리를 압박해 결국 사의 표명을 끌어냈다.
노동당은 극심한 정치 분열 속에 당과 국가의 위기를 유력한 차기 후보 앤디 버넘 의원의 리더십 아래서 해결하려는 분위기다.
스타머 총리의 사임을 촉구하며 내각을 이탈한 웨스 스트리팅 전 보건장관은 이날 버넘을 지지하면서 버넘이 영국 경제의 동반 성장, 공공서비스 개선, 당내 소통 확대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고 국수주의 세력에 맞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총리 교체로 노동당 정부가 산적한 과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우려는 여전하다고 영국 매체들은 짚었다. 경제 여건도 여전하고, 정치 분열 속에 영국개혁당은 당장 총선을 하면 최다 의석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고 조기 총선을 주장한다.
로이터 통신은 "버넘은 나라에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외에 외교, 경제, 국방 등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다"며 "스타머와 마찬가지로 버넘은 추가 차입에 반대하는 채권 시장과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생각에 성 난 유권자들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했다.
진보 성향 싱크탱크 공공정책연구소(IPPR)의 해리 퀼터피너 소장은 FT에 "여러모로 중도주의, 진보, 주류 정치의 마지막 기회"라며 "노동당은 변화를 약속해 집권했다. 유권자들은 이를 언제까지나 믿지 않고 완전히 다른 것을 찾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cheror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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