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 "단 한명의 여성도 더 잃을 수 없다" 대규모 시위
10대 소녀 피살에 여성 폭력 논란 재점화…밀레이 정부 예산 삭감 비판
(부에노스아이레스=연합뉴스) 김선정 통신원 = "우리는 단 한명의 여성도 더 이상 잃을 수 없다. 여성 살해 근절, 피해자 보호 및 관련 예산을 복구하라"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3일(현지시간) 여성 폭력 반대 운동인 '니 우나 메노스(Ni Una Menos, 단 한명의 여성도 더 잃을 수 없다)' 출범 11주년 기념 대규모 시위가 열린 가운데, 최근 발생한 14세 소녀 아고스티나 베가 여성 살해(페미사이드) 사건이 전국적 공분을 불러일으키며 여성 폭력 문제가 다시 정치·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국회의사당 광장을 비롯해 전국 주요 도시에는 수만 명의 시위자들이 모여 구호를 외치면서 여성 폭력 근절을 촉구했다.
참가자들은 특히 아고스티나 사건에서 드러난 수사당국의 부실 대응과 하비에르 밀레이 정부의 여성정책 축소를 집중 비판했다고 현지 일간 라나시온이 4일 보도했다.
아고스티나는 지난달 23일 코르도바주에서 실종된 뒤 일주일 만에 숨진 채 발견됐다. 부검 결과 성폭행을 당한 뒤 목이 졸려 살해된 것으로 확인됐으며 검찰은 33세 남성 클라우디오 바렐리에르를 페미사이드(주로 남성에 의한 여성 살해를 지칭) 혐의로 기소했다.
사건 이후 경찰과 검찰의 초동 대응을 둘러싼 논란도 확산했다. 유족과 여성단체들은 실종 신고 직후 즉각적인 수색을 요청했으나 본격적인 수색이 수일 뒤에야 이뤄졌으며, 일부 수사 관계자들이 가족들의 우려를 가볍게 여기거나 사실상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보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피의자가 지난해 여성 폭력 사건으로 신고된 전력이 있었음에도 적절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이번 시위에서는 밀레이 정부의 여성정책 축소 역시 주요 쟁점이 됐다.
시민단체들에 따르면 여성 폭력 예방 및 피해자 지원 관련 예산은 밀레이 취임 이후 약 89% 감소했으며, 관련 국가기관과 지원 프로그램도 대폭 축소됐다.
논란은 페미사이드 제도를 둘러싼 정치적 공방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밀레이 대통령은 지난해 다보스포럼 연설에서 "여성을 살해했을 때 더 무거운 처벌을 받는 것은 여성의 생명이 남성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현행 제도를 비판했다. 이후 정부는 "어떤 생명도 다른 생명보다 더 가치 있지 않다"며 형법상 페미사이드 조항 폐지 방침을 밝힌 바 있다.
반면 법학자들과 여성단체들은 페미사이드가 단순히 여성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살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나 전 배우자, 연인 등 친밀한 관계에서 반복된 폭력과 지배, 통제 속에서 발생하는 성별 기반 범죄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아르헨티나 형법은 이러한 범죄를 일반 살인보다 중대한 범죄로 규정해 무기징역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페미사이드의 경우 피해자가 가장 안전하다고 느껴야 할 가정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신뢰하던 파트너에 의해 기습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의 방어권이 원천적으로 박탈된 상태에서 자행되므로 사법당국은 이를 가중 처벌 요건으로 보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에서 200건의 페미사이드가 발생했다. 31시간마다 한명의 여성이 페미사이드로 살해된다는 뜻이다.
피해자의 83%는 가해자를 알고 있었고, 59%는 배우자 또는 전 배우자에게 살해됐다. 약 80%는 자택에서 범행을 당한 것으로 집계됐다.
2015년 14세 소녀 키아라 파에스가 남자친구에게 살해된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니 우나 메노스' 운동은 11년이 지난 현재도 여성 폭력 문제를 상징하는 사회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번 아고스티나 사건은 당시의 충격을 떠올리게 하며 운동 재점화의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sunniek8@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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