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은 로마 황제"…이란 '우리가 미국 이겼다' 주장
미국과 합의안 두고 승리 자평할 맥락찾기 분주
군사·경제적 피해 막심하지만 중동 내 영향력 증대
(서울=연합뉴스) 임화섭 기자 = 미국과 이란이 양해각서(MOU) 체결을 통한 종전 합의안을 논의중인 가운데, 에스마일 바가에이 이란 외무부 대변인이 이란 황제에 굴복한 로마 황제들의 모습을 담은 고대 부조(浮彫)의 사진과 함께 자국의 승리를 자신하는 글을 올렸다.
바가에이 대변인은 23일 0시 30분(현지시간)에 '샤푸르 1세의 낙쉐 로스탐 승리 부조' 사진과 이란 지도를 합성한 사진을 소셜 미디어 X에 올렸다.
그러면서 "로마인들의 생각에는 로마는 이론의 여지가 없이 세계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이란인들은 그 환상을 산산조각 냈다"고 말했다.
이 부조는 이란 파르스주 고대 도시 페르세폴리스 근처에 있는 낙쉐 로스탐 유적지 바위 벽에 새겨진 것이다.
사산조 페르시아 시절 침공해온 로마군에 승리를 거둔 페르시아 황제(샤한샤·왕중왕) 샤푸르 1세(재위 240∼270년)의 전공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원정에 나섰던 로마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재위 238∼244년)가 전사한 후 황제의 친정을 수행했던 근위대장 필리푸스 아라부스(재위 244∼249년)는 급히 페르시아에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강화조약을 맺은 후 로마로 돌아가 황제로 즉위했다.
그 후 발레리아누스(재위 253∼260년) 황제가 페르시아를 다시 침공했다가 페르시아군에 생포돼 로마제국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부조에는 말을 탄 샤푸르 1세의 모습이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푸스 아라부스, 발레리아누스의 모습과 함께 새겨져 있다.
이 중 전사한 고르디아누스 3세는 쓰러져서 말발굽에 깔린 모습으로, 생포된 발레리아누스는 손목이 붙들려 끌려가는 모습으로 각각 묘사돼 있다.
굴욕적 강화조약을 체결한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무릎을 꿇고 있다.
바가에이 대변인은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필리푸스 아라부스)가 페르시아를 향해 동쪽으로 진군했을 때, 그 원정은 로마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사산 왕조의 조건에 따라 수립된 평화로 끝을 맺었다. 황제는 조건을 수용해야만 했다!"고 썼다.
바가에이 대변인의 이 글은 이란 측이 미국과 논의중인 종전 합의 조건들을 '승리'로 포장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지적했다.
이란은 이번 전쟁으로 심각한 군사적·경제적 피해를 겪었으나, 역내 영향력은 오히려 더 강해지는 등 오히려 '승리했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지는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월에 "무조건 항복" 외에는 이란과의 합의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공언했으나, 결국 이란과 휴전 협상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이란 분석가이며 이란·이라크·아라비아반도 지역 전문 매체 '암와지미디어'의 편집장인 모하마드 알리 샤바니는 승리를 주장하는 것이 미국보다 이란 입장에서 더 쉽다고 NYT에 지적하면서, 다만 전략적 억지력을 투사하는 면에 있어 이란이 새로운 자신감을 가질만한 이유는 분명히 있다고 평가했다.
샤바니 편집장은 NYT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 개시 첫 날 사망한 이란의 전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1939∼2026)는 미국에 맞서는 데에 신중한 태도를 취했지만, 이번 전쟁을 계기로 후계자가 된 그의 아들 모즈타바 하메네이 등 새 이란 지도자들은 공격적 접근법을 택할 의향이 있음을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이번 전쟁에서 이란은 자국 선박들까지 차단되는 것을 감수하면서 해협을 봉쇄했고, 이웃 국가이며 미국의 핵심 역내 동맹인 페르시아만의 다른 아랍 국가들을 드론과 미사일로 공격했다.
유럽외교협회(ECFR) '이란 핵 모니터'의 저자인 분석가 엘리 게란마예는 "국내와 역내 지지 기반이 보기에, 이란은 약자(언더독)이면서도 두 개의 핵무장 국가(미국과 이스라엘)와 맞설 수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고 분석했다.
게란마예는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지배력을 고려할 때, 그들(이란)은 이전보다 더 강력한 지정학적 영향력을 갖게 됐다. 또한 그들은 트럼프가 이란과 겪고 있는 핵 딜레마가 군사력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입증했다"고 말했다.
이란 전쟁은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상대로 대규모 공습을 개시하면서 시작됐으며, 4월 8일부터는 휴전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미국과 이란은 휴전을 일단 60일간 연장하고 호르무즈 해협 통행을 재개시키는 한편 이 기간에 이란 핵 문제와 대(對)이란 제재 해제를 협상하자는 내용으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 MOU에 포함된 정확한 조건들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MOU가 체결되려면 미국 측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이란 측에서는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모즈타바 하메네이의 승인이 있어야만 한다.
limhwasop@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