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이란 전쟁 한달] 고유가 지속에 스태그플레이션 공포 부상
국제유가 배럴당 100달러대로 급등…장기화땐 高인플레·경기둔화 불가피
전쟁 조기종료해도 공급충격 여진 남을 듯…중앙은행들도 진퇴양난
(뉴욕=연합뉴스) 이지헌 특파원 = 이란 전쟁의 포화 소리가 언제 끝날지 모른 채 이미 한 달 가까이 이어지면서 세계 경제에도 먹구름이 점점 더 짙게 드리우고 있다.
국제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 위로 껑충 뛰어올랐고, 전쟁이 어떻게 전개될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세계 금융시장은 낙관론과 비관론을 오가며 출렁이고 있다.
경제학자들은 세계 경제가 유가 충격에 따른 인플레이션 상승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고 있다.
전쟁이 당장 끝난다고 가정하더라도 세계 에너지 시장이 정상화되기까지는 앞으로 수개월이 걸릴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고유가가 장기간 지속될 경우 경제가 받는 충격도 커지면서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 속 경기침체)을 걱정해야 한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 이란 반격에 호르무즈 봉쇄되자 시장 '패닉'…유가 120달러로
개전 초기만 해도 글로벌 금융시장과 석유시장은 지난해 6월 이스라엘과 이란 간 충돌 때 그랬던 것처럼 이번 사태가 금방 마무리될 것이란 낙관론이 우세했다.
국제 유가의 기준인 브렌트유 가격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 작전 직전 배럴당 72달러에서 개전 후 첫 거래일 배럴당 78달러로 상승 마감했다.
뉴욕증시는 공습 소식에 무심한 듯 강세로 마감하는 등 초반 충격은 제한적인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폭격으로 사망한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차남이자 강경파로 평가받는 모즈타바 하메네이가 이란 최고지도자로 선출되고, 그가 강한 항전 의지를 피력하자 전쟁이 장기화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면서 시장은 패닉에 빠졌다.
이란은 전세계 원유 및 액화천연가스(LNG) 물동량의 약 5분의 1이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을 사실상 봉쇄했고, 나아가 주변 걸프국의 미군 군사시설은 물론 에너지 시설을 향해 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퍼부었다.
'오일 쇼크' 공포가 덮쳐오면서 브렌트유 가격은 지난 9일 장중 배럴당 119달러대까지 치솟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2022년 6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고, 주요 선진국들은 글로벌 원유 부족을 완화하기 위해 사상 최대 규모의 비축유 방출을 결정해야 했다.
이후 석유시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과 핵심 에너지 시설의 피해 소식에 낙관론과 비관론을 오가며 롤러코스터처럼 급등락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 "1970년대 오일쇼크 두번 합친 것보다 큰 공급 충격"
전문가들은 이란 전쟁에 따른 에너지 공급 감소 충격이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수준이라고 경고한다.
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이번 위기가 1970년대 두 번의 오일 쇼크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가스 공급 충격을 모두 합쳐놓은 수준이라고 언급했다.
호르무즈 해협 운항 정상화까지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란 전망이 강해지면서 월가 전문가들은 호르무즈 봉쇄 장기화 시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를 넘어설 것이란 시나리오를 속속 내놓고 있다.
걸프국의 핵심 에너지 시설 파괴도 심각한 상황이다.
카타르는 핵심 LNG 생산 거점인 라스라판의 에너지 시설이 이란 공격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으면서 한국을 포함한 주요 수입국에 대한 LNG 장기 공급 계약에 대해 '불가항력'(Force Majeure)을 선언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당장 재개방하더라도 글로벌 석유 및 가스 시장은 최소 4개월간 공급 부족 상태를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호르무즈 봉쇄가 장기화할 경우 석유와 가스 외에도 비료, 헬륨, 황 등 주요 석유화학제품의 공급 감소가 농산물 가격 급등을 초래하고 반도체를 포함한 주요 산업의 공급망이 교란이 심화할 것이란 우려도 지속되고 있다.
◇ 인플레 우려에 글로벌 주식·채권 동반 하락…불똥 확산 우려
글로벌 주식시장도 전쟁 및 고유가 충격에서 자유롭지 않은 모습이다.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 지수는 개전 이후 약 5% 하락하며 아직은 충격이 제한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월가 전문가들은 전쟁 장기화 시 인공지능(AI) 거품 논란이 일고 있는 뉴욕증시 역시 급격한 조정을 겪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사모대출 시장의 신용 위험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채권 금리 상승이 대출 부실화를 가속화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JP모건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 최고경영자(CEO)는 개전 초기 인플레이션 상승 위험을 경고하면서 "시장에 안이함이 팽배해 있다"라고 질타하기까지 했다.
특히 중동산 원유·가스 수입 의존도가 큰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경제권의 증시는 전쟁 관련 소식에 급등락하며 변동성 장세를 지속하고 있다.
채권시장은 인플레이션 우려를 이미 채권 금리에 빠르게 반영하고 있다.
글로벌 채권 금리 벤치마크인 10년 만기 미국채 수익률은 전쟁 직전 4%를 조금 밑돌았지만, 최근 4.3∼4.4%대를 오르내리고 있다.
투자자들이 고유가에 따른 인플레이션 상승을 우려한 결과다.
◇ "유가발 스태그플레이션 위험 직면"…중앙은행들도 '진퇴양난'
전문가들은 긍정적인 시나리오를 가정하더라도 세계 경제가 인플레이션 상승 충격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한다.
유가가 배럴당 10달러 상승한 상태를 유지할 경우 인플레이션을 0.3∼0.4%포인트 밀어 올린다는 게 경제학계의 통념이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는 유가가 배럴당 140달러에서 2개월간 유지될 경우 세계 경제 일부가 완만한 침체 국면에 진입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물가가 일차적으로 관세 탓에, 이제는 전쟁 탓에 상승하고 있는 반면 성장세는 둔화하고 있다"며 미국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 위험에 직면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팬데믹 직후 인플레이션과 사투를 벌였던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다시 곤경해 처한 듯한 모습이다.
미국, 영국, 유럽연합 등 주요국 중앙은행은 이란 전쟁의 불확실성을 고려해 이달 들어 일제히 금리를 동결했다.
잉글랜드은행은 통화정책위원회 만장일치로 기준금리 동결을 결정하면서 향후 물가 급등 시 금리 인상 가능성까지 시사해 채권 시장에 충격을 줬다
월가 일각에선 연준의 연내 금리 인하 가능성이 사라지고 연준의 다음 번 금리 변경 행보가 금리 인상이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 시카고 연방준비은행의 오스탄 굴스비 총재는 최근 인터뷰에서 "인플레이션이 통제 불능 상태로 흘러간다면 금리를 올려야 하는 상황도 생각해볼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회견에서 중동 전쟁에 따른 에너지 가격 상승이 단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끌어올릴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전쟁이 경제에 미칠 잠재적 영향의 범위와 지속 기간을 파악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며 신중한 입장을 내비쳤다.
일각에선 이란 전쟁이 단기적으로는 경제에 위험 요인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중동 지역의 안정화로 인해 세계 경제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JP모건의 다이먼 CEO는 최근 콘퍼런스에서 전쟁에 따른 단기 위험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란 전쟁이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더 나은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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