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은 흥정처럼"…11년만에 핵회담 전면에 선 이란 외무장관
2015년 '이란 핵합의' 주역…하메네이 전폭적 신임 속 '역대 가장 막강한 외교수장' 평가
미-이란 3차 핵협상 일단 긍정 기류…중동 군사 긴장 속 외교 해법 물꼬 틀지 주목
(서울=연합뉴스) 임화섭 기자 = 2015년 강대국과 마주 앉아 '이란 핵합의'를 성사시킨 주역인 아바스 아라그치(63) 외무 장관이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를 상대로 한 핵협상에서 다시 전면에 나섬에 따라 11년 만에 외교 해법을 통한 극적 담판을 재현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양탄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중동 맹주 이란의 외교 수장으로 올라선 그는 자국의 협상 스타일을 전통시장에서 오고가는 흥정에 비유하면서 "참을성과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지론을 내세웠다.
26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은 이날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이어진 미국과 이란간 3차 핵협상에서 아라그치 장관의 행보를 주목하면서 이같이 진단했다.
로이터는 아라그치 장관이 트럼프 대통령의 '군사행동 불사' 협박 속에서도 합의를 통한 외교 해법을 시도하고 있으며 이는 수십년에 걸친 그의 외교관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협상이라고 지적했다.
아라그치는 지난 22일 미 CBS 뉴스 '페이스 더 네이션' 인터뷰에서 "상호 이익이 되는 외교적 해결책"이 나올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며 "따라서 (미국의 중동 지역) 군사력 증강은 필요 없다. 우리에게 압박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라그치는 2015년 이란이 이른바 'P5+1'(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등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 더하기 독일), 유럽연합(EU)과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으로 불리는 핵 합의를 체결했을 때 이란 측 협상 수석대표였다.
2015년 이란 핵합의는 트럼프 집권 1기 때인 2018년에 미국이 탈퇴를 선언하면서 깨졌다.
아라그치는 2021년 초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후 2015년 핵합의를 되살려보려던 이란 당국의 시도에서 중심 역할을 맡았으나 결국은 성공하지 못했으며, 2021년 8월 외무부 차관 겸 핵 협상 수석대표직에서 물러나고 강경론자에게 자리를 넘겨줬다.
그러나 아라그치는 얼마 후 이란 최고지도자의 자문기구인 '외교관계전략위원회'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돼 이란 최고지도부와 한층 밀접한 관계가 됐으며, 2024년 8월에 외무 장관으로 취임하면서 복귀했다.
아라그치는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전폭적 신임을 받고 있으며, 이란 이슬람공화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외무장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미국이 지난해 이란 핵시설을 폭격한 뒤로 불과 8개월만에 중동에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으나, 성직자들로 구성된 이란 이슬람공화국의 신권 통치체제 집단은 아라그치가 교묘하고 능수능란하게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아라그치는 경험을 바탕으로 쓴 2024년 저서 '협상의 힘: 정치적·외교적 협상의 원칙들과 규칙들'에서 이란의 협상 방식이 흔히 '전통시장 방식'이라고 불린다며 "지속적이고 끈질긴 흥정"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이스파한 출신 양탄자 상인의 아들인 그는 세상을 떠난 모친의 흥정 기술에 대한 추억을 이 책의 각주에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친 배짱으로 일을 그르쳐서도 안 된다며 "해가 났는데 눈(雪)을 파는 경우, 필요한 것보다 흥정을 끌면 손해"라고 이 책의 아랍어 번역판에서 설명했다.
아라그치는 2015년 핵 협상 당시 자국의 이익을 확실하게 관철하는 협상가로 명성을 쌓았다.
이란은 당시 핵 프로그램에 대한 엄격한 제한에 동의하는 대가로 제재 완화를 얻어냈다.
당시 회담에 참여했던 서방 외교관들은 아라그치가 진지하고 기술적으로 박식하며 솔직한 인물이라고 회고한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그는 작년 여름 미국이 이란 핵시설을 폭격하기 전에도 이란 측 수석대표로 미국 측과 회담을 벌였으나 당시에는 협상이 실패로 끝났다.
아라그치는 1962년 테헤란의 부유하고 신앙심 깊은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17세 때인 1979년에 이란을 휩쓴 이슬람 혁명에 참여했다.
그는 1980년대에는 이슬람혁명수비대(IRGC)에 입대해 이란-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후 제대해 1989년 외무부에 입부해 외교관 경력을 시작했다. 1996년에는 영국 켄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도 받았다.
그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주(駐)핀란드 대사,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주일본 대사를 지냈고 2011년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을 시작으로 2021년 8월 외무부에서 퇴직할 때까지 여러 분야 차관직을 지냈다. 2013년에는 외무부 대변인도 맡았다.
독실한 무슬림인 아라그치는 실용파에서 강경파에 이르는 다양한 성향의 대통령들을 보좌해왔다.
이란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아라그치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와 가까운 사이인 정치권 내부자이면서도 파벌간의 정치적 분쟁과 내분과는 거리를 둬 왔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아라그치에 대해 "최고지도자, 혁명수비대, 이란의 모든 정파들과 관계가 좋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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