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세계 4위 경제블록의 꿈, 열매 맺을까
'성장정체+인구절벽' 같은 병 걸린 韓日…정글 세계속 경제연합은 생존 문제
양국 재계 찬성 기류 속 정치권 조심스레 저울질…일각서 한미일 경제연합 구상도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국제 정세가 따라가기도 숨찰 만큼 급변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패권 다툼을 이어가는 가운데 유럽은 옛 영화를 뒤로 하고 쇠퇴 중이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분쟁이 일고 남미·유럽에선 우경화 바람이 분다. 강대국들이 실리를 추구하면서 무역 장벽이 부활했고 '역세계화'(Deglobalization) 기조 속에 다자외교는 옛말이 됐다. 두 차례 세계 대전이 일어났던 20세기 전반기를 보는 듯하다. 역사는 순환한다던가. 야만의 정글로 회귀하는 듯한 기시감이 든다. 이럴 때 정세 흐름을 놓치면 한 세기 전 약자의 저주가 우리에게 되풀이될 수 있다.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세력 다툼의 화약고 위치에 놓인 우리는 끝없이 변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지배받는 숙명을 지녔다. 천연자원도 거의 없이 대외 무역에 의존한 처지니 기민하고 정교하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지난 연말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던진 '한일 경제공동체' 구성 제안은 그래서 이목을 끈다. 유럽연합(EU) 식 경제 통합을 모델로 삼은 한일 경제 연합이 실현만 된다면 세계 경제와 안보 지형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엄청난 파급력을 갖고 있어서다. 우선 한일 양국이 경제 블록을 이루면 역내 총생산(GDP) 규모가 최대 7조 달러에 육박하는 세계 4위 경제권이 탄생한다. 우리 돈 약 1경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규모다. 3대 경제권인 미국, EU, 중국에 한일 블록이 추가돼 '빅4' 구조로 국제 경제 질서가 재편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룰 테이커'(규칙 수용자)에서 '룰 세터'(규칙 제정자)로 변신할 기회를 의미한다. 유례없는 일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유능한 '패스트 팔로워'(빠른 추격자)로 급성장했다면, 한일 연합을 통해 국제 경제 규범을 정하는 '퍼스트 무버'(선도국)로 도약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강대국 반열에 오를 수 있다. 단 두 나라의 결합만으로 미국, 중국도 함부로 못 할 신흥 강호가 탄생할 길이 열리는 것이다. 한일 양국이 중국의 경제 보복과 미국의 무역 압박을 겪었던 아픔을 공유하는 데다, 저성장·저출산·고령화의 덫에 함께 걸렸다는 점에서 당장 뭐라도 해보자는 공감대는 충분해 보인다.
특히 한일 경제 연합은 산업 구조, 문화·인종적 유사성, 지리적 근접성 등 측면에서 엄청난 시너지를 낼 것으로 기대된다. 대표적 기술 국가이자 공산품 무역 국가인 한일 양국은 한 몸이 되면 독보적 경쟁력을 드러낼 분야가 많다. 무엇보다 한국의 세계 정상급 응용·제조 능력과 세계 최고인 일본의 기초 소재·부품·장비 능력이 결합하면 상호보완성이 극대화된다. 특히 이런 강점은 반도체, 인공지능(AI), 정보통신(ICT) 등 첨단 산업에서 '초격차'를 구현해낼 수 있다. 조선, 자동차, 배터리, 방산 등 전통적 전략 산업도 마찬가지다. 아울러 한일 연합은 미래 산업 주도권을 좌우할 '기술 표준'의 상당 부분을 선점할 발판이 된다.
'인구 절벽'이란 공동의 적을 만난 한일 양국의 내수 시장을 크게 확장하는 효과도 얻는다. 1억 7천만 명의 거대 내수 시장이 형성되면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생산성 저하와 소비 부진을 상당 부분 해결할 힘이 생긴다. 양국 금융 시장의 결합은 달러화 변동성 대응 능력을 제고하고 첨단 산업과 우량 기업에 막대한 투자 여력을 갖게 한다. '아시아 금융 허브' 구축도 가능하다. 특히 커진 내수 시장에서 일본의 막대한 가계 저축 자본과 한국의 역동적 스타트업 생태계가 만나면 '아시안 실리콘밸리'가 탄생할 수도 있다.
세계 최대 에너지 수입국 그룹에 속하는 한일 양국이 가스와 원유 등을 공동 구매하면 협상력 제고를 통해 수입 단가를 크게 낮추고 가격 변동과 수출국 횡포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여권 없이 이동하는 EU 스타일의 인적 교류가 양국 간 허용되면 물류비와 여행 비용 등이 획기적으로 줄어들고 물류·유통·관광·의료 산업 활성화, 소비 진작 등을 통한 경제 선순환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안보 측면에서도 한일 간 불필요한 긴장이 완화되고 공급망과 해상 수송로가 안정되는 등 이점이 많다. 특히 한일과 각기 동맹 관계지만, 장기적으론 대륙 세력에 맞설 한·미·일 삼각 동맹을 원하는 미국도 환영할 만하다. 삼각 동맹 걸림돌이 한일 간 껄끄러운 관계여서다. 특히 미국의 최대 목표가 중국 견제란 점에서 아시아 최대 우방인 양국의 밀착은 중국의 부상을 막을 방파제다. 다만 미국은 한일 연합이 너무 커지는 건 견제할 것으로 보인다. 양국의 대미 협상력이 강해지는 데다, 미국으로 생산시설 유인에 차질을 빚고 달러 패권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아예 한·미·일 삼국 경제공동체를 추진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한일 간에도 해결할 문제들이 있다. 과거사와 영토 분쟁 등을 둘러싼 갈등이 잠재했고 국민감정에도 앙금이 말끔히 사라지지 않았다. 전자, 자동차 등 겹치는 주력 산업이 여전해 역내 경쟁도 불가피하다. 다만 험악해지는 국제 정세에서 두 나라가 지도상에서 소멸하지 않고자 풀어야 할 난제들은 이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양국 젊은 세대들에게 과거 비극 대신 풍요로운 미래를 물려줘야 한다는 점에서도 전향적 사고가 필요하다. 실제 변화 조짐도 있다. 우리 국민의 대일 호감도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상승 중이고, 양국 재계는 연합 찬성 쪽으로 기울었다. 양국 정치권도 실용주의 관점을 견지하며 가능성을 조심스레 탐색 중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시절 영국 외교를 주도한 헨리 템플 전 총리의 의회 연설이 생각난다.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다. 우리 이익은 영원하고, 이를 따르는 것이 우리 의무다."
lesl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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