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분투칼럼] 안창호의 빗자루질…'아프리카돼지열병' 낙인을 쓸자
박기태 반크 단장
[※ 편집자 주 = 연합뉴스 글로벌문화교류단이 국내 주요대학 아프리카 연구기관 등과 손잡고 '우분투 칼럼'을 게재합니다. 우분투 칼럼에는 인류 고향이자 '기회의 땅'인 아프리카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여러 교수와 전문가가 참여합니다. 아프리카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우분투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우분투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 반투어로, 공동체 정신과 인간애를 나타냅니다.]
역사는 가끔 낡은 흑백사진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선명한 미래의 길을 묻는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태평양 건너 미국 땅에 첫발을 내디뎠던 우리 한인들의 삶은 처참했다. 나라 잃은 설움은 기본이었고, 그보다 더 살을 파고드는 고통은 바로 서구 사회가 덧씌운 지독한 차별과 멸시의 낙인이었다. 당시 서구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인은 그저 '미개하고 더러운 동양인'일 뿐이었다. 인간으로서 존엄은 부정당했다. 가난과 비위생이라는 굴레는 마치 천형처럼 우리 민족을 옥죄었다.
그 절망의 한복판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은 분노 대신 빗자루를 들었다.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그는 동포들의 거주지 구석구석을 쓸고 닦았다. 누군가는 망국의 지도자가 하기에는 하찮은 일이라 여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도산에게 청소는 단순한 위생 관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을 향한 '더럽다'는 편견의 얼룩을 지워내는 성스러운 의식이었다. 그는 오렌지 농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한인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오렌지 하나를 따더라도 애국하는 마음으로 하자."
이 짧은 문장 속에는 거대한 철학이 담겨 있다. 도산은 사소한 노동, 작은 행동 하나가 모여 결국 한 민족의 '국격'을 완성한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정직한 땀방울과 단정한 태도가 곧 조국 대한민국의 얼굴이 된다는 가르침이었다. 도산의 실천 덕분에 한인들은 점차 '성실하고 깨끗한 민족'이라고 인정받기 시작했고, 이는 훗날 독립운동의 도덕적 자산이 됐다.
◇21세기, 여전히 존재하는 '언어의 낙인'
강산이 열 번도 더 변한 2026년 오늘, 대한민국은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 강국으로 우뚝 섰다. 100년 전 우리를 괴롭히던 '미개함'의 꼬리표는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우리는 자문해야 한다. 인류의 인식 지평은 과연 넓어졌는가. 우리는 타 문명을 온전히 존중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세계 곳곳에는 여전히 특정 대륙을 향한 뿌리 깊은 편견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그 대표적인 피해자가 바로 아프리카 대륙이다.
'질병, 빈곤, 분쟁.' 서구 중심의 미디어가 지난 수십 년간 아프리카에 덧씌운 3대 프레임이다. 54개국 15억 인구가 살아가는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대륙을 이 세 단어로 가두는 것은 명백한 폭력이다. 그리고 이 폭력을 무의식적으로, 그러나 아주 강력하게 재생산하는 기제가 바로 전 세계 정부와 언론이 관성적으로 사용하는 '아프리카돼지열병'(African Swine Fever·ASF)이라는 용어다.
이 질병은 1921년 동아프리카 케냐에서 처음 보고됐다. 하지만 그것은 100년 전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지난 세기 동안, 이 바이러스는 국경과 대륙을 넘어 전 지구적으로 확산했다. 이에 따라 전 세계 양돈 산업을 위협하는 보편적인 가축 전염병이 됐다. 발원지가 어디였는지는 이제 방역학적 연구 자료로서나 의미가 있을 뿐, 현재 전 세계적인 발병 상황과는 아무런 지리적 연관성이 없다. 이미 바이러스는 유럽과 아시아의 야생 멧돼지 사이에서 토착화돼 아프리카와는 무관하게 생존하고 있다.
그런데도 세계동물보건기구(WOAH), 유엔식량농업기구(FAO)와 같은 국제기구들은 여전히 공식 문서에 'African'(아프리칸·아프리카의)이라는 단어를 고수하고 있다. 심지어 아시아나 유럽의 한복판에서 발병한 사례를 보고할 때조차 이 용어는 수정되지 않는다. 이는 마치 바이러스가 아프리카라는 대륙의 본질적인 속성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다. 서구의 주요 외신들은 아시아 지역의 발병 소식을 전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아프리카의 열악한 농장 사진을 자료 화면으로 사용한다. '아프리카는 질병의 근원지'라는 시각적·언어적 프레임을 끊임없이 강화하고 있다.
◇왜 '이름'이 중요한가: 실질적 차별의 문제
누군가는 "그저 이름일 뿐이지 않으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학계에서 오랫동안 써온 용어를 바꾸는 비용이 많이 든다는 현실적인 반론도 존재한다. 하지만 언어는 사고를 지배하고, 사고는 현실을 창조한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라는 명칭은 단순한 단어의 조합을 넘어,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 대한 사회경제적 차별 기제로 작동한다.
생각해 보자. 특정 질병명에 '한국'이나 '서울'이 붙어 전 세계 통용된다면 우리는 어떨까. 그 이름이 불릴 때마다 우리의 관광 산업은 타격을 입고, 우리의 수출품은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해외로 나간 우리 국민들은 잠재적 보균자 취급을 당할 것이다. 현재 아프리카가 겪고 있는 현실이 바로 그와 같다. 이 낙인은 아프리카를 찾는 관광객의 발길을 돌리게 만들고, 국제 사회의 투자 심리를 위축시키며, 아프리카 국가들이 빈곤에서 벗어나려는 자립의 의지를 꺾는다. 이는 명백한 '경제적 제재'이자 '문화적 차별'이다.
국제 사회는 이미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5년 새로운 질병 명명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특정 지리적 위치, 사람의 이름, 동물, 식품 종류, 문화, 인구, 산업, 직업 등을 포함하는 병명을 피하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이 원칙에 따라 2009년 '멕시코 독감'이나 '돼지 독감'으로 불렸던 질병은 '신종 플루'(H1N1)로 불렸다. 초기 '우한 폐렴'으로 불리며 혐오를 조장했던 바이러스는 '코로나19'(COVID-19)라는 중립적인 이름을 얻었다.
유독 '아프리카돼지열병'만이 이 흐름에서 비껴가 있다. 이는 국제 사회가 아프리카에 대해 갖는 무관심과 이중잣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다. '우한'은 안 되지만 '아프리카'는 괜찮다는 인식,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타파해야 할 21세기판 오리엔탈리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한민국, '선진국'의 품격은 어디서 오는가
이 지점에서 대한민국이 나서야 할 당위성이 생긴다. 우리는 제국주의의 침탈과 식민 지배, 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선 나라다. 서구 사회로부터 '희망이 없는 나라', '구제 불능의 땅'이라는 조롱받았던 역사를 뼈에 새기고 있는 민족이다. 차별이 얼마나 아픈지, 편견이 한 사회를 어떻게 병들게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우리가 침묵한다면 그것은 역사의 직무 유기다.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가 전개하고 있는 '아프리카돼지열병 명칭 변경 캠페인'은 단순한 명칭 변경 운동이 아니다. 이는 100년 전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 땅에서 실천했던 '인권 회복 운동'의 21세기 버전이다. 이 병명을 병리학적 특성을 반영한 '돼지출혈열'이나 '돼지급성열성질환', 혹은 중립적인 'ASF형 돼지열병'으로 바꿀 것을 한국 정부와 국제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타당하며, 인권적으로도 정의로운 요구이다.
지금 전 세계는 한국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BTS와 블랙핑크의 노래에 전 세계인이 열광하고,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이 보여준 한국의 콘텐츠 파워는 상상을 초월한다. 전 세계 2억명에 달하는 한류 팬덤은 한국이 발신하는 메시지를 수용할 준비가 됐다. 문화 강국(Soft Power)이란 단순히 춤과 노래를 잘 만드는 능력이 아니다. 국제 사회의 어젠다를 선점하고, 보편적 인류애와 윤리적 가치를 선도할 때 비로소 진정한 '세계인에게 존경받는 매력적인 국가'가 완성된다.
현재 그 어떤 국가도 이 오래된 관행을 깨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있다. 모두가 관성에 젖어 있을 때, 한국이 먼저 나서서 공식 문서에서 '아프리카'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대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어떨까. 이는 15억 아프리카인들에게 한국이 단순한 경제 파트너를 넘어,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존엄을 지켜주는 진정한 친구임을 증명하는 강력한 신호가 될 것이다. 이는 수천억 원의 공적개발원조(ODA)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외교적 자산이다.
◇작은 실천이 만드는 위대한 변화
다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도산은 거창한 구호를 외치기 전에 빗자루를 들었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오렌지를 땄다. 그 '작은 실천'이 모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이제 우리 차례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마다 찜찜함을 느껴야 한다. 언론은 관행적인 헤드라인 쓰기를 멈추고, 정부와 학계는 용기 있게 용어 변경을 공론화해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차별의 찌꺼기를 걸러내는 일, 그것은 타인을 위한 배려인 동시에 우리 자신의 품격을 높이는 일이다.
오렌지 한 알에 애국을 담았던 그 마음으로, 이제는 전 지구적 공존을 위해 언어를 다듬자. 한국이 주도해 아프리카의 오랜 오명을 씻겨줄 때, 우리는 비로소 도산의 정신을 계승한 진정한 선진국이라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차별과 혐오를 넘어 존중과 연대의 시대로 나아가는 길, 그 위대한 변화의 시작점에 대한민국이 서 있다. 지금 바로, 우리가 그 빗자루를 들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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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기태 단장
현 반크 단장, 경기도 인공지능위원회 위원, 직지 홍보대사 활동 중, 재외동포청 정책자문위원, 재외동포정책실무위원, 외교부·대검찰청 정책자문위원, 청와대 청년위원회 위원, 국가브랜드위원회 자문위원, KOICA 홍보전문위원, 국제교류재단 공공외교홍보대사, 서울시 홍보대사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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