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떠돌던 항일 의병장·송시열·채제공 문집 책판 3점 돌아온다(종합)

입력 2026-02-09 10:03
美 떠돌던 항일 의병장·송시열·채제공 문집 책판 3점 돌아온다(종합)

국가유산청, 1970년대 반출된 책판 기증받아…'기록유산' 가치 커

장식 더하고 금·은색 덧칠 변형…"도난·분실된 유물→기념품 둔갑"

국외 반출 사례 추가 조사…주미대사관 영사부 건물에 기념 동판



(서울 워싱턴=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조준형 특파원 = 조선 후기 유학자와 항일 의병장의 문집 책판이 미국으로 건너간 지 50여년 만에 고국 품으로 돌아온다.

국가유산청과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은 미국 워싱턴DC 소재 주미대한제국공사관에서 '척암선생문집'·'송자대전'·'번암집' 책판 3점을 기증받았다고 9일 밝혔다.

책판은 서적을 간행하기 위해 나무판에 글씨를 뒤집어 새긴 나무 판이다.

조선시대에는 주요 유학자의 문집이나 저작물을 제작할 때 책판을 썼는데 현재 718종 6만4천226장이 '한국의 유교책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돼 있다.



이번에 기증받은 책판은 1970년대 초 한국에서 근무했던 미국인이 일종의 '기념품'으로 구입해 미국으로 가져가 보관한 유물이다.

1917년에 판각(板刻·나뭇조각에 그림이나 글씨를 새김)한 '척암선생문집' 책판은 척암 김도화(1825∼1912) 선생의 문집을 찍은 책판이다.

김도화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직후 유생들이 일으킨 을미의병 당시 경북 안동 지역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척암선생문집' 책판은 현재 19점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돼 있으며, 재단은 2019년 라이엇게임즈의 후원을 받아 독일 경매에서 1점을 구입하기도 했다.



이번 책판은 1970년대 초 미국 연방기구인 국제개발처(USAID) 한국지부에서 일했던 앨런 고든(1933∼2011) 씨가 한국의 골동품상으로부터 사들인 뒤 미국으로 가져간 것으로 조사됐다.

2011년 고든 씨가 사망한 뒤에는 부인이 보관하다 지난해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에 기증 의사를 밝혔고, 협의를 거쳐 재단 미국사무소로 넘어오게 됐다.

'송자대전' 책판은 조선 후기 유학자 우암 송시열(1607∼1689)의 문집과 연보 등을 모아 만든 것으로, 1926년 판각한 것으로 파악된다.

문집은 1787년 처음 간행됐으나 1907년 일본군에 의해 책판 전체가 소실됐다. 이후 1926년 후손들과 유림이 책판을 다시 새겨 복각했다고 전한다.



복각한 책판 1만1천23점은 현재 대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앞서 고든 씨는 '척암선생문집' 책판과 함께 '송자대전' 책판을 구입해 미국으로 가져갔고 여동생인 앨리시아 고든에게 '송자대전' 책판을 선물했다고 한다.

조선 영조(재위 1724∼1776)와 정조(재위 1776∼1800) 시기 국정을 이끈 핵심 인물인 번암 채제공(1720∼1799)의 문집 '번암집' 책판도 돌아오게 됐다.

'번암집' 책판 역시 역사·문화적 가치가 큰 유산이다. 전체 1천159점 가운데 358점만 남아 있으며 '척암선생문집' 책판과 함께 세계기록유산에 일괄 등재됐다.



'번암집' 책판은 1970년대 초 한국에서 근무했던 미국인이 한국의 어느 골동품상에서 산 뒤, 미국으로 가져와 재미교포 김은혜 씨 가족에게 선물한 것이다.

김은혜 씨는 이 사실을 파악한 재단의 제안을 받고 기증을 결정했다고 한다.

기증받은 책판은 법·제도가 정비되기 전 국외로 반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책판 3점 모두 손잡이인 마구리에는 금속 장식을 덧대었고, 윗부분에는 고리를 달아 벽에 걸 수 있도록 했다. 전통문화 상품처럼 꾸민 형태다. 먹을 입혀 인쇄하는 글씨 위에 금색과 은색을 덧칠한 부분도 눈에 띈다.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국내에서 도난 혹은 분실된 책판 중 일부가 기념품으로 둔갑한 뒤 외국인에게 판매되고 해외로 반출된 과정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기증자 앨런 고든 씨의 외손자인 에런 팔라 씨는 8일(현지시간) 워싱턴의 주미대한제국공사관에서 열린 기증식에서 "정당한 주인에게 정당하게 돌려준 것일 뿐"이라며 "문화는 콜라처럼 가질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기증자 김은혜 씨는 "(한국이) 뜻하지 않게 잃어버렸던 소중한 문화유산을 좋은 분들의 안내로 한국에 다시 돌려드릴 수 있게 돼 감사하다"며 "각지에 산재한 문화유산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오늘은 전세계에 나가 있는 대한민국 주요 유산들의 한 조각을 맞추는 역사적 순간"이라며 "여러분이 기증한 유물들을 잘 보존함으로써 후손들에게 뜻깊은 유물을 물려줄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국가유산청과 재단은 비슷한 사례가 더 없는지 조사에 나설 방침이다.

국가유산청은 이날 워싱턴 주미국대한민국대사관 영사부 건물에 '대한민국 최초 대사관'임을 알리는 기념 동판을 설치할 예정이다.

주미대사관 영사부 건물은 대한민국 정부가 1949년 세계 최초로 대한민국 대사관을 설치한 곳이다.

국가유산청은 "정부 수립 이후 미국 현지에서 대한민국 정부 승인, 각종 국제기구 가입 등을 통해 대한민국의 외교적 기틀을 마련한 곳"이라고 평가했다.



장면(1899∼1966) 초대 대사부터 김동조(1918∼2004) 대사에 이르기까지 역대 주미대사가 집무한 공간이자 대한민국 외교공관 중 가장 오래 사용한 곳이기도 하다.

국가유산청이 나라밖 문화유산에 기념 동판을 부착하는 건 2021년 주미대한제국공사관, 2023년 주영대한제국공사관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기념 행사에는 허민 국가유산청장, 강경화 주미대사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국가유산청 관계자는 "주미대사관 영사부 건물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전 세계 방문자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ye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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