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본·유럽까지"…핵군축 공백에 핵무장론 불붙나
'핵보유 심리' 걸림돌 없어지고 트럼프 동맹 경시에 불안 가중
"NPT 핵심조건 와해"…유럽은 이미 자체 핵무장 공론화 단계
(서울=연합뉴스) 장재은 기자 = 반세기 넘게 세계 안보의 한 축을 지지해온 미국과 러시아의 핵군축 협정이 사라지면서 안보 불안을 겪는 여러 국가들에서 자체 핵무장론이 득세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동맹 경시에, 핵무기 확산을 국제규범에 반하는 금기로 보는 공감대 약화가 맞물려 기술력을 갖춘 미국의 일부 동맹국들에서는 이미 핵무장 논의가 공론화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신전략무기감축조약(New START·뉴스타트)은 글로벌 안보 지형의 변화와 양국의 이해관계 충돌 속에 5일(현지시간) 종료됐다.
뉴스타트는 미국과 소비에트연방(러시아의 전신)이 1969년 핵군축 협상을 시작해 빚어낸 결실 중에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온 유일한 협정이었다.
지구촌 파멸을 막자는 정신을 냉전 종식 후에도 이어받아 규범에 따른 예측 가능한 핵통제 시대를 수십년간 떠받쳐온 마지막 기둥으로 인식되는 때가 많았다.
최근 러시아와 중국이 핵무기를 양적, 질적으로 고도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까닭에 일찌감치 사문화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핵을 보유한 강대국이 스스로 한계를 설정한 노력의 틀로서 상징성이 있다는 평이 우세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이 같은 위상을 주목해 뉴스타트의 종료를 "국제 평화와 안보에 중대한 순간"이라고 평가하면서, "우리는 반세기 넘게 지나 처음으로 러시아와 미국의 전략 핵무기에 대한 어떠한 구속력 있는 제한도 없는 세계를 마주하게 됐다"고 탄식했다.
한발 더 나아가 안보 전문가들은 규범을 지키고 준수를 압박해야 할 강대국이 스스로 군축 노력을 포기함으로써 세계 각국이 공유하는 정신적 경계선이 붕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핵무기를 제조할 기술을 갖춘 국가들이 자국의 안보 불안을 이유로 궁극적인 안전보장 도구가 될 수 있는 핵무기에 손을 뻗을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는 얘기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외교정책 전문가인 기드온 로즈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핵무기 비확산을 막던 심리적 걸림돌이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실제로 뉴스타트의 종료와 강대국들의 핵군축 협정 공백은 핵무기 비확산의 지구촌 규범인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충격파를 줄 것으로 보인다.
스웨덴 싱크탱크 스톡홈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이번 사태가 핵무기를 둘러싼 글로벌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NPT는 ▲ 신규 핵보유국의 금지하는 비확산 ▲ 핵무기 보유국들의 성실한 군축 협상 ▲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등 3대 원칙으로 운용된다.
SIPRI는 "핵무기가 없는 국가들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는 대가로 핵보유국들이 비핵화로 나아간다는 게 NPT의 핵심적인 거래 조건"이라며 "대체 협정이 없는 뉴스타트의 종식으로 비핵화 전망은 더 멀어졌고 핵심적 거래 조건은 뿌리째 흔들리게 됐다"고 지적했다.
각국의 핵무장론은 핵무기를 금기시하는 국제사회 공감대와 규범의 약화뿐만 아니라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정책 때문에 더 자극받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안보 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회원국들을 상대로 적대적인 외교·통상정책을 펼치고 있어서다.
미국은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워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수준을 넘어 덴마크령 그린란드나 캐나다 같은 동맹국 영토를 병합하겠다는 위협까지 꺼낸 바 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는 집단방위 협정이 체결된 나토 동맹국의 안보가 적대국의 도발이나 침공으로 악화할 경우에 군사적으로 개입할지에 대해서도 확답을 꺼리고 있다.
미국 정부가 작년 11월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에서 "미국이 전 세계의 질서를 아틀라스처럼 떠받치는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한 것도 이런 기조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러시아의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안보에 극도의 불안을 느끼는 유럽 내 미국 동맹국들에 이 같은 상황 전개는 최악 시나리오를 대비할 필요성으로 체감되는 분위기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작년 2월 미국이 유럽 안보에서 발을 뺄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며 프랑스 핵우산을 다른 유럽 동맹국들에 확장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프랑스와 함께 유럽의 쌍두마차를 이루는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프랑스의 핵우산 확장안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러시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서유럽보다 안보 위기가 심각한 동유럽에서는 자체 핵무장론까지 나오고 있다.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작년 3월 폴란드 의회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안보 무임승차론에 위기감을 토로하며 핵무기를 비롯한 비재래식 현대적 군사력이 필요하다고 사태를 진단했다.
러시아에 침공당한 미국의 우방국 우크라이나에서는 소련에서 독립한 뒤 핵무기를 스스로 포기한 역사를 후회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북유럽에서도 러시아의 위협 증가, 미국에 대한 불신 고조에 따라 핵무장론이 제기되고 있다.
울프 크리스테르손 스웨덴 총리는 지난달 25일 프랑스, 영국과 핵무기 협력에 대한 예비 논의를 마쳤다. 구체적 논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스웨덴의 최대 일간지인 다겐스 뉘헤테르는 트럼프 대통령의 그린란드 병합론이 본격화하던 지난달 10일 게재된 칼럼에서 "누구도 스웨덴의 핵무기를 논의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유럽뿐만 아니라 중국의 세력 확장과 북한의 도발을 우려하는 동아시아에서도 핵무장론이 물밑에서 꿈틀거린다는 관측이 있다.
중국이 강대국으로서 수시로 '힘의 외교'를 시도하고 북한이 사실상 핵보유국 행세를 하는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동맹 경시, 불확실한 안전보장은 한국과 일본에도 생존전략을 조정할 필요성과 직결되는 것으로 평가된다.
잭 리드(민주·로드아일랜드) 미국 상원의원은 지난 3일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이 같은 맥락을 언급하며 뉴스타트 종료 때문에 미국 동맹국들에 동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와 동맹국 정부들 사이에서 발생한 불안을 목격해왔는데 많은 국가들, 특히 유럽, 일본, 한국에서 자체 핵억제 체계를 서둘러 보유하겠다는 관심이 새롭게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전 세계에서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춘 국가, 일부 핵 물질까지 보유한 국가를 모두 합쳐 40곳 정도로 보고 있다.
로즈 고테묄러 전 나토 사무차장은 미국 군사전문매체 디펜스원 인터뷰에서 미국 동맹국들 중 최소 몇곳은 자체 핵무기 개발을 검토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핵확산 가능성, 소위 '친화적인 핵확산'(미국 동맹국들의 핵무기 보유)이 매우 우려된다"며 "나토 동맹국들 사이에서 놀랄 정도로 많은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상황을 전했다.
jangj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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