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시선] 월드컵 보이콧
(베를린=연합뉴스) 김계연 특파원 =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반쪽짜리로 열렸다. 동서냉전이 최고조에 이르면서 미국 중심의 서방 국가들이 모스크바 대회에 불참했고 4년 뒤 소련 주도로 공산권이 똑같이 보복했다. 상대 진영에서 열린 올림픽을 망치는 데는 성공했으나 강대국 싸움에 선수와 팬들만 피해를 봤다.
그 뒤로도 개최국에 불만을 품고 대형 스포츠 행사를 보이콧하자는 주장은 종종 있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합병, 4년 뒤 카타르 월드컵은 성소수자·노동자 인권이 문제가 됐다. 그러나 1980년대 올림픽 보이콧에 대한 반성 덕분인지 현실화하지는 않았다.
미국과 캐나다·멕시코가 공동 주최하는 북중미 월드컵을 반년 앞두고 보이콧 주장이 또 나온다. 미국 정부의 출입국 규제와 이민자 단속, 국제축구연맹(FIFA)의 티켓 폭리에 팬들이 먼저 들끓어 올랐다. 그러다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덴마크령 그린란드 합병 위협을 참지 못한 유럽 정치권과 축구계 인사들이 대표팀을 미국에 안 보내는 '진짜' 보이콧을 제안했다.
유럽은 세계 축구 지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역대 FIFA 회장 9명 중 8명이 유럽 출신이고 1월 FIFA 랭킹 10위권 중 7개팀이 유럽 국가다. 본선 티켓을 딴 유럽 16개국이 단합해 불참한다면 월드컵 흥행 실패는 뻔하다. 안그래도 참가국을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늘리면서 수준 낮은 경기가 많을 것이라는 걱정이 나오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란드 문제를 협상하겠다고 한발 물러선 뒤에도 보이콧 주장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유럽의회 의원 19명은 유럽축구연맹(UEFA)에 편지를 보내 그린란드 갈등과 FIFA 평화상 논란에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월드컵 보이콧은 필연적으로 스포츠의 정치화를 둘러싼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전세계를 막무가내로 위협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느닷없이 평화상을 만들어 트럼프에게 헌사한 FIFA를 보이콧으로 응징할 것인가. 그라운드에서 화합을 이룬다는 스포츠 정신을 배반하고 축구를 국제정치 무기로 쓸 것인가. 부패 의혹으로 쫓겨난 뒤 보이콧을 부추기는 전직 FIFA 회장, 가자지구 평화회담까지 기웃거리며 트럼프 눈도장 찍기에 열심인 현직 FIFA 회장을 보면 축구판이 이미 정치판이라서 어느 한쪽 편들기도 힘들다.
유럽에서도 유독 독일에서 보이콧 주장이 계속되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 선전무대로 전락시킨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최국이라서 그런지, 프란츠 베켄바워의 공간 창출 능력을 존재론 철학에 빗댈 만큼 축구에 진심이어선지 보이콧 논의에도 몹시 진지하다. 훌리건 폭력과 인종차별이 난무하는 유럽 다른 리그와 달리 분데스리가에 진보적 가치를 앞세운 클럽이 많은 탓도 있다. 이번에도 정치적 올바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상파울리 구단이 총대를 맸다.
그러나 정작 팬들은 월드컵에 불참해 트럼프의 콧대를 꺾기보다, 홈팀이자 세계 최강 브라질을 준결승에서 7대1로 깨고 네번째 우승을 차지한 2014년 월드컵의 '여름동화'를 재현하길 더 바라는 듯하다. 독일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한국에 0대2로 져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4년 뒤 카타르에서는 일본에 패하며 2연속 조별리그 탈락의 수모를 겪었다. 그 와중에 FIFA의 무지개 완장 금지에 항의 표시로 '입틀막' 퍼포먼스를 했다가 축구보다 정치를 앞세운다는 비판을 받았다. 유럽으로서는 "이제 무기가 축구밖에 없냐"는 자조가 더 뼈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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