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로] 간과하면 후회할 '원화 약세' 경고등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1992년 미국 대선 국면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빌 클린턴 캠프가 꺼내든 캠페인 구호다. 당시 공화당의 어떤 반격도 안 통할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클린턴을 승리로 이끈 이 구호는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 슬로건 중 하나로 기억된다. 정치권에선 반대파를 꺾고자 다양한 전략과 술책에 때로는 공작까지 동원하지만, 결국 정치적 승패를 결정하는 최대 요인은 먹고사는 문제임이 입증된 사례다.
새 정부가 되새겨볼 만한 이야기다. '새 술은 새 부대에'란 말처럼 임기 초반 차별화한 정책들을 추진하는 건 당연하지만, 우리 경제에 심상찮은 조짐들이 보인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은 귀담아듣는 게 좋다. 대중은 인기성 정책들에 환호하다가도 민생경제에 이상 신호가 켜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하게 돌아선다는 걸 우리는 반복적 경험을 통해 잘 안다. 정부·여당이 흔들리면 국정이 불안정해져 국가 전체가 불행해질 수 있는 만큼, 다수 국민은 개인적 정치 성향이 어떻든, 적어도 새 정부가 초반부터 경제에 발목 잡히는 일은 없길 바랄 것이다. 그러니 여권은 전문가들의 우려를 참고해 정책 기조를 재점검하고 발 빠르게 보완하는 유능한 집권 세력의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
작년 수출이 사상 최고치를 찍고 경상수지 흑자도 역대 최대가 예상되므로 우리 경제 펀더멘털이 견조하다는 정부의 설명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다만 1997년 외환 위기 직전에도 당시 정부가 경제 펀더멘털이 좋으니 별일 없을 거라고 주장했던 건 묘한 기시감을 준다. 물론 정부의 설명을 믿지만, 그렇다고 방심하거나 경계를 게을리해선 안 될 것이다. 과거 환란은 김영삼 정부의 무지와 무능, 정치권의 안일함과 식견 부재, 감시견 역할을 외면한 언론의 후진성 등이 겹치며 일어난 비극이었다. 재발을 막으려면 과거를 반성하고 아무리 작은 경고 신호라도 예사롭지 않게 여겨야 한다.
무엇보다 현재 전문가들의 우려가 집중되는 부분은 환율이다. 정부의 온갖 방어 노력에도 원/달러 환율은 꾸준히 상승해 1달러당 1천500원 선을 넘어설 수 있다는 우려 가득한 전망이 나온다. 이런 고환율 지속은 경제 비상 신호로 외부에 비칠 수 있다. 특히 우리 화폐 가치 하락 현상이 장기간 고착할 수 있다는 점이 두렵다. 근래 들어 원화 실질 가치는 2009년 금융 위기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원/달러 환율 1,330원대(2024년 기준)를 적정 수준으로 보는데, 원화 가치 자체 하락으로 1,400원대가 뉴노멀이 될 것이란 걱정 섞인 전망이 적지 않다.
이런 현상은 각국 정부와 투자자들이 대한민국 화폐의 가치를 점점 낮게 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 경제에 대한 신뢰 자체가 조금씩 떨어져 간다는 뜻도 될 수 있다. 만약 원화 약세가 더 장기간 고착할 경우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 즉 펀더멘털에 결함이 생겼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져 국가신용등급이 하락할 수 있다. 고환율 지속이 외화부채 규모를 키워 재정 건전성을 훼손하고 수입 물가 상승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을 촉발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시장에서 자금을 회수하는 현상이 가중돼 보유외환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부를 수 있다. 국내 투자자들도 원화 자산을 기피하고 달러 자산에 투자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원화 약세 고착화가 올해 지방선거를 앞둔 여권의 아킬레스건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이미 다양한 환율 방어 대책이 쏟아졌지만, 백약이 무효인 듯하다. 이는 단기 미봉책으론 안 되니 근본적 대책이나 정책 기조 수정이 필요하다는 신호일 수 있다. 전문가들은 과잉 유동성 회수, 재정 긴축, 국가부채 축소, 가계부채 관리, 외국인 투자 이탈 방지를 위한 기업 규제 완화 등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최장기 기록을 경신 중인 한미 기준금리 역전 해소도 시급하다. 기축통화국 금리가 더 높은 상태가 비정상적으로 길어지자 자본 유출을 가속하고 있다. 하지만 과도한 가계부채 탓에 금리 인상 시 부동산 시장과 서민 경제가 붕괴할 가능성도 함께 걱정해야 하는 총체적 난국이다. 집권 후 첫 전국단위 선거를 앞두고 고환율과 물가 잡기라는 숙제를 받아 든 새 정부의 향후 행보를 나라 안팎에서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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