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호주 시드니를 누비는 '교통약자의 발'…현대로템 NIF 2층 열차
2016년 계약 첫 사업, 작년 말부터 운행…장애인 화장실·비상벨 등 갖춰
50곳 이해관계자와 협의 215번·건의 2천871개 접수…"가장 성공적인 철도"
(시드니·터거라[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연합뉴스) 임성호 기자 = 호주 최대 도시 시드니의 교통 허브인 센트럴역.
도시철도와 지역·광역·대륙횡단 철도 열차가 모두 모이는 호주의 '서울역'인 이곳에서는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출입문의 빨간 패널이 돋보이는 열차를 만날 수 있었다.
바로 현대로템이 창원공장에서 제작해 납품한 '마리융'(Mariyung) 2층 전동차다.
마리융은 시드니 지역 원주민 다루그족의 언어로 호주의 국조(國鳥) 에뮤를 부르는 말로, 열차 옆면에는 다루그족 예술가의 에뮤와 에뮤 발자국 등의 그림이 있었다. 원주민 공동체의 문화와 정체성을 존중한다는 의미다.
이 열차는 현대로템이 호주 시장에 내디딘 첫발이다.
현대로템은 지난 2016년부터 2021년까지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NSW) 정부와 총 610량(1조 6천억원 규모)의 NIF(New Intercity Fleet·신형 도시간 열차) 공급 계약을 맺고 올해 6월까지 납품을 마쳤다. 사업은 발주 기준으로 현지에서 나온 단일 철도 프로젝트 중 역대 2위 규모다.
NIF 열차 운행은 지난해 12월 시드니 북부로 이어지는 센트럴 코스트&뉴캐슬 노선에서 처음 이뤄졌고, 지난 10월 13일에는 시드니 서부로 향하는 호주의 대표 관광 노선인 블루마운틴 노선에서도 시작됐다. 내년 1분기에는 시드니 남부행 사우스 코스트(울런공) 노선에도 투입될 예정이다.
이날 센트럴역에서 터거라역까지 약 98㎞, 1시간 30여분간 타 본 코스트&뉴캐슬 노선 NIF 열차에서 눈에 띈 것은 여느 열차보다 많은 '교통약자 배려 포인트'였다.
계단을 통해 1·2층을 택할 수 있는 2층 구조였지만 휠체어와 자전거 이용자, 노약자 등은 출입문 바로 옆의 전용 공간을 이용할 수 있게 돼 있었다.
현대로템 관계자는 "길게는 2시간 넘는 장거리를 다니게 되니 많은 승객이 앉을 수 있게 2개 층에 최대 823석(10량 기준·입석 2천82명 탑승)의 규모를 갖추면서도 교통약자의 편안한 이동도 보장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화장실도 열차 한 편성(세트)에 장애인용, 비장애인용이 모두 설치돼 있었다. 장애인용 화장실은 휠체어가 출입할 수 있도록 문 폭이 넓고 만일 쓰러지더라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벽과 바닥 근처에 비상벨이 하나씩 있었다. 세면대 옆에는 인슐린 주사기 등을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의료폐기물 수거함도 보였다.
승객 션 자피아(83)씨는 "NIF는 실내가 넓고 기둥도 없어 나처럼 걸음이 불편한 이들도 편히 이용할 수 있다"며 "좌석마다 콘센트와 접이식 트레이가 설치된 것도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이런 '이용자 맞춤형(포용) 설계'가 곧 굴지의 글로벌 경쟁자들을 제치고 대규모의 NIF 사업을 수주한 핵심 전략이었다고 현대로템은 설명했다. 2016년 입찰 이전까지 호주 사업 경험이 없던 현대로템은 프랑스 알스톰, 중국 CRRC(중궈중처), 스위스 슈타들러레일 등 현지에서 잔뼈가 굵은 기업들을 꺾고 수주에 성공했다.
현지 시행청이 다양성을 존중하는 호주 문화에 맞춰 교통약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위한 특수 설계를 요청했는데, 경쟁사들은 난색을 보였지만 현대로템만은 이를 최대한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다.
현대로템은 호주 철도 유지보수 업체인 UGL, 전장부품 담당인 미쓰비시전기 호주(MEA)와 레일커넥트 컨소시엄을 구성해 13개월에 걸친 이해관계자 협의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장애인단체, 노인·자전거협회, 기관사노조 등 50곳 이해관계자와 215차례의 협의를 통해 2천871건의 건의를 접수했다.
브란트 클리포드 현대로템 호주지사 책임연구원은 "호주 장애인 차별금지법(DDA), 장애인 대중교통 표준(DSAPT) 등을 반영하고 안내방송과 점자 등 8가지의 교통약자 이동 편의를 위한 요구사항을 충족했다"고 설명했다. 호주 최초로 DSAPT 철도차량 부문 기준을 100% 맞추기도 했다.
니하 사타시밤 호주지사 매니저는 "단순히 건의를 취합해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라 상충하는 요구를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조율한 것이 현대로템의 경쟁력"이라고 덧붙였다.
당시 이해관계자 협의에 참여한 그레그 킬레인 전 호주 척수장애인협회 정책개선 선임 담당관은 "현대로템은 논의 과정에서 실제 크기 열차 목업(모형)을 만들어 피드백을 받았고, 직원들도 포용적이고 진지한 태도를 보인 점이 감명 깊었다"고 돌아봤다.
현대로템이 현지 맞춤형 설계에 쏟은 정성은 인정과 호평으로 돌아왔다.
영업운행 11개월 만인 지난달 3일에는 '6만㎞ 주행·6개월 이내 고장 1건 이하' 수준의 신뢰성을 입증하며 최종인수승인(FA)을 받았다.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역대 2층 전동차 사업 중 최단기간으로 34개월(2018년), 40개월(2011년)이 걸린 경쟁사보다 훨씬 빨랐다.
클레어 포거티 레일커넥트 대표는 "정부 발표에 따르면 NIF는 운행 시작 당시 시드니 철도 중 고객 만족도 측면에서 가장 성공적인 서비스 사례로 기록됐다"고 전했다.
NIF 열차에 동승한 이용배 현대로템 대표이사 사장은 "NIF 수주에 기반해 호주 퀸즐랜드주에서도 성과를 거두며 호주에만 전동차 1천량을 공급하게 됐다"며 "글로벌 시장 확장세를 이어가는 것도 호주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은 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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