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분투칼럼] 이해하기 어려운, 이해할 수 있는, 이해해야 하는
: 아프리카 주재원의 3단계 현지 문화 이해
이현정 한국수출입은행 대외협력기금(EDCF) 카이로 소장
[※ 편집자 주 = 연합뉴스 우분투추진단이 국내 주요대학 아프리카 연구기관 등과 손잡고 '우분투 칼럼'을 게재합니다. 우분투 칼럼에는 인류 고향이자 '기회의 땅'인 아프리카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여러 교수와 전문가가 참여합니다. 아프리카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우분투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우분투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 반투어로, 공동체 정신과 인간애를 나타냅니다.]
아프리카 국가에 주재원으로 머물다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종종 생긴다. 한 번은 운전기사 포함 현지 직원들에게 사무소 회식을 제안했다. 식당 선택은 현지 직원들에게 맡겼다. 현지 직원이 평소 먹는 식사가 4천원 이내라 비싸야 인당 2만원 정도일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비싸기로 유명한 식당이었다. 현지 직원들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음식을 많이 시켰다. 결국 평소 먹지 않던 생소한 메뉴가 많아 음식을 남겼다. 계산 금액은 예상의 두 배를 넘었다. 현지 직원들에게 호구 잡힌 듯한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내 유튜브에는 알고리즘상 아프리카 관련 콘텐츠가 많이 올라왔다. 'EBS 글로벌 프로젝트 나눔' 사연들이 그중 많았다. 에피소드 중 하나로 부모를 잃은 장남이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바나나 농장에서 일했다. 자기 키보다 큰 바나나 송이를 옮기고 일당으로 겨우 몇백원을 받았다. 그는 동생들 먹일 식량도 사야 했다. 필기구가 없어 교실에서 쫓겨날 아우를 위해 연필도 사야 했다. 이제 막 돌 지난 막내의 목에 둘러줄 목걸이도 사야 했다.
하지만 몇백원으로는 그중 하나만 가능했다. 필자는 당연히 먹을 것이나 학용품을 살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그는 고민 끝에 목걸이를 샀다. 그 선택은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느 날 불의의 사고를 당한 딸을 기억하려는 독지가가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에 거액을 후원하며 의미 있는 사업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마침 탄자니아에서 집안 형편상 학업이 어려운 소녀들을 무료로 가르치는 기숙형 중학교를 세우고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는 수녀님이 떠올랐다. 이러한 사정을 설명하고 문의했더니 그 후원금으로 학생들을 위한 수영장을 짓고 싶다고 했다. 당시 기숙형 중학교는 코로나19로 후원금이 줄어 매일매일 들어가는 식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식자재도 아니고, 학습이나 직업훈련 기자재도 아니었다. 한국 중학교에도 없는 수영장이었다. 그런데도 필자는 수녀님께 "수영장은 사치인 것 같습니다"라고 단호히 거절하지 못했다.
이집트는 남쪽으로 갈수록 전통적 사고가 강하다. 남쪽 아스완에서 일하는 한국 봉사자에 따르면 약속 시간에 늦은 사람이 아니라 늦었다고 나무라는 사람이 무례하다고 한다. 시험시간에 보여달라는 사람이 아니라 정색하고 거절하는 사람이 무례하다.
이집트에 부임한 초기에 길을 물었을 때 엉뚱한 방향으로 안내받아 낭패를 본 적이 있다. 이곳에서는 "나도 길을 모른다"라고 하지 않고 틀린 대답이라도 해 주는 게 예의였다. 필자는 그 사정을 모르고 잘못된 길로 가다 시간을 허비하고 혼자 분을 삭였다.
우리는 시간이 부족하면 곧바로 요점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집트에서는 아무리 급해도 먼저 인사를 나눈다.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은 차나 커피를 권한다. 손님은 그 차나 커피를 조금이라도 마셔야 한다.
한국은 약속과 규율을 지키고 형식보다 내용을 중요시한다. 반면 이집트는 규율보다 타인을 무안하지 않게 하는 것, 내용보다 형식을 갖추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터무니없는 상황에서도 정색하며 솔직하게 말하기보다 불쾌함을 드러내지 말고 에둘러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다.
이집트는 여행자들에게 바가지 씌우기와 호객행위로 악명이 높다. 정가가 얼마인지 혹은 관심은 별로 없지만 그냥 한번 봐도 되는지 묻다가 매우 불쾌했던 경험담이 많다. 필자의 경우 "고맙지만 안 돼요"(No, thank you)라 말하며 시선을 돌리고 다른 상인을 찾거나 내 갈 길을 가면 불쾌할 일이 거의 없었다. 다만 팁을 기본으로 생각하는 이집트 문화에서 서비스의 질을 따져 팁 여부나 금액을 정하려는 필자는 가끔 무례한 사람으로 보일 때가 있었다.
먹지도 못할 비싼 메뉴를 한참 시켰던 직원들은 평생 한 번도 가지 못할 식당과 메뉴를 회식이라는 기회로 한번 경험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 살이 되면 다들 아이 목에 목걸이를 걸어준다. 고아가 된 막내의 휑한 목이 걸렸던 장남은 하루 더 굶고 한 번 더 교실에서 쫓겨나는 것보다 앞으로 막내가 겪을 주변의 시선과 눈치가 더 싫었을 것이다.
학생들과 24시간을 함께하던 수녀님은 아이들이 더운 여름 맑은 물에서 해맑게 노는 모습에서 행복을 꿈꿨을 것이다.
얼마 전 한 비정부기구(NGO)의 모금 안내 뉴스레터를 받았다. 카보베르데라는 섬나라에서 수영장 건설을 위한 후원 안내였다. 몇 년 전 귀한 후원금을 수영장 건립에 쓰겠다던 그 수녀님이 떠 올랐다.
시간이 지나며 현지 문화에 조금씩 적응하고 있다. 처음에 당황했던 일들이 지금은 이해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된다. 형편없는 서비스에도 팁을 강요하는 듯한 태도, 의미 없는 인사와 호의의 말은 번지르르한데 사소한 약속조차 지키지 않거나 간단한 업무 질문에 묵묵부답인 사람들. 인사치레인지 거짓말인지 헷갈리는 말들. 이런 일에 필자는 아직도 혼자 분을 삭인다.
하지만 현지인들 입장에서 보면 필자의 성의 없는 짧은 인사, 직설적인 표현, 예측하기 어려운 대중교통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는 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 이해의 간극을 좁혀야 비로소 상호 신뢰와 협력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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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정 소장
현 한국수출입은행 EDCF(대외경제협력기금) 이집트 카이로 사무소장, 서강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서울대 글로벌 MBA, 세종대 국제개발협력학 석사, EDCF 탄자니아 사무소장(2017), 경협사업1부 팀장(2020), EDCF 아프리카부장(2021). EDCF 가나 사무소장(2022)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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