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위드인] 하드코어 아니면 방치형으로, 양극화되는 게임 세상
PC·콘솔은 소울라이크 유행…모바일은 숏폼 방치형 게임 우후죽순
(서울=연합뉴스) 김주환 기자 = 극한의 난이도로 플레이어를 몰아붙이는 하드코어 액션 게임과 간편한 조작·빠른 보상 지급으로 도파민 분비를 자극하는 방치형 게임이 동시에 주류 장르로 뜨고 있다.
어려운 게임은 더 어렵게, 쉽고 간단한 게임은 더 간단하게 만드는 추세는 해외는 물론 국내 게임업계의 신작 개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어려울수록 재밌다? 보편적인 '게임의 문법' 되는 소울라이크
단적인 예는 소울라이크(Souls-Like)라는 장르명의 보편화다.
소울라이크는 일본 게임사 프롬 소프트웨어가 선보인 '다크 소울' 시리즈의 영향을 받은 액션 게임을 일컫는 말이다.
게임마다 조금씩 편차는 있지만, 소울라이크 게임은 기본적으로 어려운 게임이다.
의도적으로 불친절하게 만든 스테이지와 강력한 공격을 퍼붓는 보스를 실력으로 쓰러뜨려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엔딩을 볼 수 있다.
똑같은 보스를 몇 시간씩 죽고 살아나기를 반복하며 상대하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간신히 클리어하면 커다란 성취감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플레이어들도 이런 장르적 문법에 익숙해지면서 소울라이크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소울라이크에 오픈월드 요소를 접목한 '엘든 링'은 2022년 국제 시상식을 휩쓸며 지난 9월까지 전 세계에서 2천800만 장이 팔렸다. 캐릭터 육성은 좀 더 자유롭고 편해졌지만, 보스전만큼은 '다크 소울' 시리즈보다 더 어려워졌다는 평가다.
그로부터 2년 후에 나온 '엘든 링'의 스토리 확장 DLC(다운로드 가능 콘텐츠) '황금 나무의 그림자'는 그 어렵다는 본편보다 훨씬 더 어렵고 맵 디자인도 악랄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유통사 반다이 남코에 따르면 '황금 나무의 그림자'는 출시 일주일만에 500만 장이 팔리고, DLC로서는 최초로 세계 최대 게임 시상식 '더 게임 어워드'(TGA) 최고상 후보에 올랐다.
소울라이크의 매운맛에 익숙해진 게이머들이 더욱더 매운맛을 찾아 나서는 모양새다.
더 어렵고 힘든 게임을 추구하는 것은 후발 주자들도 마찬가지다.
작년 국내 게임사 네오위즈[095660]가 출시해 대한민국 게임대상을 받은 'P의 거짓'도 발매 초기에 너무 어렵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결국 제작진은 게임을 조금 더 쉽게 수정해야 했다.
넥슨이 내년 3월 출시를 예고한 '퍼스트 버서커: 카잔'도 올해 진행한 베타 테스트 기준으로 난도가 만만찮다는 평가다.
다른 장르의 게임들도 소울라이크와 유사한 게임성을 도입하고 있다.
핵앤슬래시 역할수행게임(RPG) '패스 오브 엑자일'(POE)의 정식 후속작 'POE 2'는 전작에 없던 구르기를 도입하고, 사실상 '연습 게임' 취급받던 초반부 스테이지부터 높은 난도와 죽으면 여태껏 잡은 몬스터들이 전부 되살아나는 요소를 도입했다.
이용자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크게 갈리고 있지만, 전작을 답습하지 않으려는 이같은 과감한 시도는 흥행 요인으로 작용했다.
◇ 버튼 하나만 누르면 보상이 와르르…슬롯머신 닮아가는 방치형 게임
소울라이크의 정 반대 방향에는 방치형 게임이 있다.
방치형 게임은 직접 플레이하지 않아도 캐릭터가 알아서 전투나 작업을 수행하는 게임이다. 플레이어가 할 일은 모은 자원을 수집하거나 이를 캐릭터 강화, 마을 건설 따위에 쓰는 일뿐이다.
초창기 방치형 게임은 정말 플레이어를 '방치'하는 게임이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쌓이는 재화를 모으고, 이를 기반으로 재화 수급량을 늘리며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는 캐릭터를 보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방치형 게임의 전면에 등장한 뽑기 요소는 장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올해 중순 국내 앱 마켓에서 매출 1위를 기록한 중국 게임 '버섯커 키우기'의 핵심 요소는 무작위로 캐릭터 강화 장비가 나오는 램프다.
자원 자체는 게임을 하지 않아도 모이지만 램프를 통한 장비 획득은 게임에 접속해야지만 할 수 있다.
높은 등급의 아이템이 나오면 캐릭터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램프에서 나오는 아이템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다.
넷마블[251270]의 '일곱 개의 대죄 키우기'는 이 램프를 3장의 카드를 뽑아 차례로 뒤집는 방식으로 바꿨는데, 3장이 모두 동일한 카드일 경우 '잭팟' 수준의 보상이 터진다.
일각에서는 방치형 게임을 '다마고치'에 비유하지만, 실상은 슬롯머신에 훨씬 더 가까운 셈이다.
'탕탕특공대' 개발사로 유명한 중국 게임사 하비(Habby)의 '카피바라 Go!'도 방치형 게임과 유사한 보상 시스템을 차용한다.
게임 속에서 검과 방패를 든 카피바라 용사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플레이어가 '진행' 버튼을 눌러줘야 한다.
그 과정에서 무작위로 적을 만나 전투를 치르거나 보물상자를 여는 등 이벤트가 발생하는데, 운 좋게 '대박'이나 '중박'이 뜨면 압도적으로 좋은 강화 효과가 뜨면서 캐릭터가 강해진다. 룰렛 돌리기나 카드를 뒤집어 보상을 얻는 미니게임도 나온다.
그간 대작 MMORPG에 집중해온 엔씨소프트[036570]도 올해 하반기 핵심 신작으로 '리니지' IP 기반 방치형 게임 '저니 오브 모나크'를 내놨다.
'저니 오브 모나크'는 정교한 수익모델(BM) 설계, 플레이하면 기존 '리니지' 모바일 게임 3부작에서 사용할 수 있는 쿠폰을 지급하는 이벤트 등의 영향으로 앱 마켓 매출 순위 10위권을 기록하며 순항하고 있다.
◇ OTT·숏폼의 공세에서 게임이 살아남는 방법
소울라이크와 방치형 장르의 대두는 게임이 OTT(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숏폼 콘텐츠와 정면 경쟁해야 하는 시대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이달 발표한 '2024 게임 이용자 실태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간 게임을 이용한 적 있다고 답한 국민 수는 역대 최저치인 59.9%로 떨어졌다.
전체 게임 이용률을 집계하기 시작한 2015년 이래 처음으로 60% 선이 무너진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해제되며 야외 활동이 늘어나고, 영상 콘텐츠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게임이 가지고 있던 여가생활의 파이를 상당 부분 잠식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와 동시에 게이머들이 게임을 하는 시간은 주중 171분, 주말 253분으로 지난해보다 각각 12분씩 늘었다.
즉 게임을 하는 사람은 줄었지만, 남아 있는 게이머들은 더 많은 시간을 게임에 투자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게임 기업의 중요한 과제는 제한된 24시간 동안 어떻게든 이용자를 더 오래 게임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게임의 최대 경쟁 상대는 다른 게임이 아니라 OTT 콘텐츠와 숏폼 영상 같은 대체 여가 콘텐츠기 때문이다.
어려운 난도로 플레이어를 수없이 도전하게 만드는 소울라이크, 쉽고 빠른 보상 시스템으로 이용자를 중독시키는 방치형 게임은 어떤 면에서는 동일한 사명을 가지고 시장에 출시되는 셈이다.
jujuk@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