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영국 의회 '5시간 법안토론'이 부럽다
(서울=연합뉴스) 최재석 기자 = 지난주 영국에서 시한부 환자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법안이 하원 문턱을 넘었다. 영국 하원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표결에서 '조력 사망' 법안을 찬성 330표, 반대 275표로 통과시켰다. 실제 법안 시행까지는 여러 절차가 남았지만 의회의 1차 표결 관문을 가까스로 통과한 것이다. 이 법안은 말기 질환을 앓아 여생이 6개월 이하라는 의사의 소견을 받은 시한부 환자가 의학적 도움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만 18세 이상 성인에게만 적용되고 의사 2명과 고등법원 판사의 서명이 있어야 한다.
이 법안이 관심을 끄는 것 못지않게 영국 의회의 의사결정 과정에도 눈길에 간다. 하원의원들은 표결에 앞서 이 법안을 두고 5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영국 BBC 보도 등에 따르면 의원들은 개인적인 스토리까지 공개하고 찬반 토론에 나섰다. 160명 이상의 의원이 발언권을 신청했지만 시간 제약 때문에 많은 이들이 실제 토론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장시간의 토론 후 표결은 자유투표로 이뤄졌다. 정해진 당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의원 스스로 찬반 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라 표를 던졌다. CNN은 의원들이 정치적 고려 없이 각자의 양심에 따라 어느 쪽이든 지지할 수 있었다고 논평했다.
집권 노동당 내에서 찬반이 엇갈렸다. 키어 스타머 현 총리와 레이철 리브스 재무장관은 법안에 찬성했지만 앤절라 레이너 부총리, 데이비드 래미 외무장관, 웨스 스트리팅 보건장관, 샤바나 마무드 법무장관은 반대표를 던졌다. 스타머 총리는 의회 찬반 토론에서 어떤 발언을 하지 않았고, 당 소속 의원들의 결정에 영향 주길 원치 않는다며 사전에도 찬반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영국 정부도 이번 법안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제1야당 보수당도 찬반이 갈리긴 마찬가지였다. 케미 베이드녹 당대표는 법안에 반대했지만 리시 수낵 전 총리와 올리버 다우든 전 부총리는 법안에 찬성한 당내 소수 세력과 뜻을 같이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당론을 정하지도 않았고 당 대표의 '사전 언질'도 없는 상태에서 의원 각자가 판단을 내린 것이다. 앞서 2015년 하원 표결에서는 같은 내용의 법안이 부결됐다.
한국 국회에서도 영국 의회와 같은 풍경을 상상할 수 있을까. 물론 두 나라 의회의 역사와 문화가 다르다. 양원제 국가인 영국에서 입법의 주도적 역할을 하는 하원은 제출된 법안에 대한 심의 과정에서 활발한 토론을 벌이는 오랜 전통이 있다. 본회의장도 토론에 적합하게 직사각형 구조로 의원들이 서로 가깝게 마주 보는 형태로 좌석이 배치돼 있다. 넓은 타원형 구조인 우리 국회 본회의장과는 대비된다. 22대 국회도 여야 간 극한 대치의 연속이다. 연말까지도 여의도에선 삭감 예산안 단독 처리와 공무원 탄핵 같은 정쟁 이슈만 난무할 뿐 국민의 삶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토론과 숙의, 타협이 이뤄지는 국회의 모습을 영 기대할 수 없다면 의사당 구조라도 바꿔봐야 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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