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현장 레바논] 깃발 흔들고 축포 쏘고…"아버지 보고파요" 귀가 행렬
이-헤즈볼라 휴전 첫날…서둘러 고향찾는 사람들로 베이루트행 비행편 매진
"죽거나 살거나 반반 확률이겠거니…이제 나다닐 것" 베이루트 활기찬 모습
이스라엘 집중 공습한 '헤즈볼라 핵심 근거지' 다히예, 불꺼지고 붕괴된 건물 잔해만
(베이루트·뒤셀도르프=연합뉴스) 김동호 특파원 = "아버지를 빨리 만나고 싶어요."
이스라엘과 친이란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휴전에 돌입한 27일(현지시간) 오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던 한나(59)씨는 부친과 상봉할 기대에 찬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팔레스타인 출신인 그의 가족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때 피란길에 올라 레바논에 정착했고, 본인은 17살이던 1982년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나와 현재 독일에서 거주하고 있다. 작년 이맘때 전쟁이 격화한 이후로 통 고향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독일 서부 뒤셀도르프 공항에서 만난 한나씨는 "레바논은 독일보다 훨씬 날씨가 좋고, 팔레스타인은 더 아름다운 곳인데…전쟁으로 많은 것이 파괴돼서 슬퍼요"라고 말했다.
한나씨는 레바논에 비행기가 내리자 기자를 다시 찾아와 아버지가 입원해있다는 레바논 남부 시돈(사이다) 병원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손에 건네주며 "시간이 되면 꼭 한 번 놀러오라"고 당부했다.
이스라엘과 헤즈볼라간 휴전 첫날인 이날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를 찾았다.
수개월 만에 레바논에서 교전이 멈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국외에 머물던 많은 사람이 서둘러 귀국길에 오르면서 많은 항공편이 순식간에 매진됐다.
기자가 주재하는 튀르키예 이스탄불은 레바논과 멀지 않아 평소 비행편을 쉽게 예매할 수 있지만, 이날은 독일을 우회하는 경로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동유럽 하늘을 한바퀴 돌아 9시간 만에 도착한 베이루트의 라피크 하리리 국제공항은 활기찬 모습이었다.
커다란 여행가방을 두개씩 챙겨온 사람들, 가족과 친지를 마중 나온 현지인들이 가득 들어찬 모습만 보면 이곳이 이스라엘군 공습에 툭하면 운영이 중단되곤 했다는 사실을 연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입국장 난간에 기대 옹기종기 모여있던 젊은 여자 대학생 무리는 들뜬 목소리의 유창한 영어로 "두바이에서 오는 친구를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지난 9월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에서 지상전에 돌입하자 깜짝 놀란 부모님이 친구를 아랍에미리트(UAE) 집으로 불러들였는데, 어제 밤 휴전이 타결됐다는 기사를 보고는 곧장 비행기표를 예매해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베이루트아랍대학교에서 마케팅을 전공하는 노란 차반(19)씨는 "중간고사에 대비해 공부해야 할 때이지만 친구 얼굴을 보러 나왔다"며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러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같은 학교 컴퓨터공학과 캐런 엘마이(21)씨는 레바논 남부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으로 귀가 행렬에 오른 이가 많다며 "이스라엘군이 아직 대피해있으라고 경고했다던데, 우리한테 미사일을 쏘던 이가 이런 얘기를 하면 누가 듣겠나"라고 꼬집었다.
그는 "나도 죽거나 살거나 반반 확률이겠구나 싶었다"고 공습이 한창이던 때를 돌이키더니 "일단 지금은 밖으로 나다니고 싶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기자가 공항을 나서려고 돌아서자 캐런의 언니 제닌 엘마이(22)씨는 "지금 차를 몰고 나온 사람들이 많아서 이동하는 길이 많이 막힐 수도 있다"라고 귀띔했다.
아니나 다를까,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하는 도로는 차들이 뒤엉켜 혼잡했다.
창문 밖으로 헤즈볼라를 상징하는 노란 깃발을 흔들며 휴전을 축하하는 차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택시가 공항에서 숙소로 이동하는 길에 헤즈볼라의 핵심 근거지인 베이루트 남부 교외 다히예 지역을 지났다. 가로등도 전부 전기가 나가 어두운 가운데 이스라엘군의 집중 폭격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가 스쳐 지나갔다.
이스라엘의 집중 폭격 대상이 됐던 다히예 일대에는 이날 하루 종일 총으로 축포를 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주레바논 한국대사관은 교민들에게 "헤즈볼라가 쏜 축포의 낙탄에 유의해야 한다"며 "총격이 발생하면 건물 안으로 몸을 숨기고 창문에서 떨어져 있어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d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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