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기술 전쟁 격화…TSMC "가장 엄중한 도전"
ASML "정치적 동기 커져…동맹들에 더 많은 통제 압박"
(서울=연합뉴스) 황정우 기자 = "반도체, 특히 최신 반도체 부문의 자유무역은 죽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어떻게 계속 성장할지가 우리의 도전이다."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의 장중머우(張忠謀·모리스 창) 창업자가 지난 26일(이하 현지시간) 대만 신주현에서 열린 TSMC 연례 체육대회에서 한 발언이다.
엔비디아 인공지능(AI) 칩을 사실상 독점 생산하는 등 AI 붐에 올라타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둔 것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TSMC 창업자는 보호무역주의 강화를 "가장 엄중한 도전"으로 규정했다.
미 정부는 지난 2020년 국가안보 우려를 이유로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가 미국산 장비를 사용해 제작된 반도체를 구매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제재를 가했다. 당시 TSMC는 화웨이로부터 신규 주문 접수를 중단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현재 미 상무부는 TSMC가 화웨이용 AI·스마트폰 칩 제조에 관여했는지 여부를 조사 중이다. TSMC는 화웨이에 반도체를 전달한 고객사 한 곳에 대해 제품 공급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 ASML에는 이미 '부닥친 위기'
미국의 대(對)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가 TSMC에는 '가장 엄중한 도전'이지만 세계 1위 반도체 장비 업체인 네덜란드 ASML에는 이미 '부닥친 위기'다.
ASML은 지난 15일 "내년 매출이 300억∼350억유로(약 44조9천100억~52조4천억원)로 예상된다. 이는 '2022 인베스터 데이'에 우리가 제시했던 수치의 절반보다 작다"고 발표했다. 이 같은 암울한 실적 전망에 당일 ASML 주가는 16.26% 폭락했다.
로저 다센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실적 발표 뒤 가진 투자자들과의 전화회의에서 내년에 중국 매출 비중이 약 20%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그는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 뉴스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추측들이 있다. 그 결과로 중국에 대한 더 조심스러운 전망을 취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내년 매출 예상치를 대폭 낮춘 배경에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가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 반영됐음을 시사한다. ASML 매출에서 중국 매출 비중은 지난 3분기 기준 47%에 달한다.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는 미국의 의도를 겨냥한 발언을 내놨다.
크리스토프 푸케 CEO는 지난 4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한 콘퍼런스 연설에서 대중국 반도체 수출 통제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정치적 동기가 커지고 있다"며 "국가안보와 관련된 일이라고 말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며칠 뒤 푸케 CEO는 영국 런던에서 블룸버그가 주최한 행사에선 "지정학적 상황을 보면 미국이 동맹국들에 더 많은 통제를 가하라고 계속 압박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고 했다.
ASML은 첨단 반도체 양산에 필수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생산한다. 삼성전자나 TSMC 등 주요 반도체 제조 업체가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 ASML 장비를 사용한다.
네덜란드 정부는 2019년부터 ASML의 EUV 노광장비에 대해 중국 수출을 금지하고 있다. 지난해 9월부터는 미국 압박에 신형 심자외선(DUV) 장비에 속하는 NXT 2000i 이상급 모델에 대해서도 정부 수출 허가를 받도록 했고, 지난달에는 ASML 구형 장비에 대해서도 같은 조처를 도입했다.
◇ "미국, 새로운 조치들 더 내놓을 것"
로이터 통신은 지난 23일 바이든 행정부와 트럼프 행정부의 전직 당국자, 업계 전문가, 양측 캠프 관계자 등을 취재한 결과, 중국으로 향하는 반도체 제조 장비와 AI 칩들에 대한 추가적인 수출 통제와 함께 중국산 반도체와 스마트카 등의 미국 수입을 늦추기 위한 새로운 조치들이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로이터는 "이번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나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가운데 누가 승리하든 미중 첨단 기술 냉전은 격화할 것이 확실하다"고 봤다.
바이든 행정부 안보 분야 당국자였던 피터 해럴은 "데이터와 소프트웨어, 커넥티드 디바이스들에 초점을 맞춘 미중 기술 전쟁의 새로운 전선이 열리고 있다"고 말했다.
미 상무부가 지난달 23일 차량연결시스템이나 자율주행시스템에 중국·러시아와 연계가 있는 특정 소프트웨어(2027년식부터)나 하드웨어(2030년식부터)를 탑재한 차량의 수입과 판매를 금지한다고 발표한 것, 중국계 동영상 공유 플랫폼인 틱톡의 미국 내 사업권을 강제 매각하도록 하는 법안이 지난 4월 미 연방의회를 통과한 것을 로이터는 예로 소개했다.
미 재무부는 29일 반도체와 양자컴퓨팅, AI 등의 첨단기술과 관련한 미국 자본의 중국 투자 통제를 골자로 하는 규칙을 발표했다. 이 규칙은 내년 1월 2일부터 시행된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특정 전자 설계 자동화 소프트웨어, 특정 제조 또는 고급 패키징 도구, 특정 고급 집적회로의 설계 또는 제조, 집적회로용 고급 패키징 기술, 슈퍼컴퓨터와 관련된 거래 등이 금지된다.
양자컴퓨팅 분야의 경우 개발 또는 생산에 필요한 핵심 부품 생산, 특정 양자 감지 플랫폼의 개발 또는 생산, 특정 양자 네트워크 또는 양자 통신 시스템 개발 또는 생산 등의 거래가 금지된다.
AI 분야에선 모든 AI 시스템 개발과 관련된 거래가 금지된다.
이시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은 지난 23일 한국경제인협회가 개최한 한 세미나에서 "대선 결과와 상관없이 중국에 대한 견제는 더욱 강화될 것"이라며 "통상장벽의 범위가 수출 통제 위주에서 해외직접투자 및 전문인력 이동 통제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김수동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내놓은 '트럼프 재선 시 통상정책 변화와 우리의 대응 방안'에서 "트럼프 재집권 시 통상정책 방향은 늘어나는 미국의 대세계 무역수지 적자에 대한 대응과 중국 공산당의 경제적 위협에 대한 대응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김 위원은 "중국 공산당의 경제적 위협에 대한 대응은 현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 AI 등의 첨단 전략산업에 대한 중국 견제 정책과 큰 틀에서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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