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궤멸' 국가보안법에 흔적 없는 '홍콩 우산혁명' 10주년

입력 2024-09-26 11:37
'민주궤멸' 국가보안법에 흔적 없는 '홍콩 우산혁명' 10주년

2014년 행정수반 직선제 요구하며 79일간 도심 센트럴 점령…"홍콩인들 정치적 각성"

2019년 더 큰 반정부시위로 연결…두 국가보안법 서슬에 '시민 저항운동' 역사 잊혀져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센트럴을 점령하라"(Occupy Central·占領中環)라는 구호가 홍콩 중심가를 79일간 점령했던 '홍콩 우산혁명'이 오는 28일로 10주년을 맞는다.

이국적이며 자유와 낭만이 넘치던 홍콩에 중대한 정치·사회적 변화를 이끈 '분수령'으로 평가되는 2014년 홍콩 우산혁명은 이후 2019년 훨씬 더 큰 규모의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를 용인하지 않은 중국이 2020년 홍콩국가보안법을 직접 제정하고, 이어 올해 3월에는 홍콩 정부가 별도로 자체 국가보안법을 추가로 제정하면서 홍콩에서는 더이상 어떠한 집회와 시위도 일어나지 않아 홍콩 우산혁명은 역사로만 남게 됐다.



◇ 행정수반 직선제 요구…최루탄 진압에 우산 펼쳐 맞서

홍콩 시민들은 2014년 9월 28일부터 79일간 센트럴 도심 도로를 점거하는 시위를 벌였다. 센트럴은 한국의 명동에 해당하는 홍콩 최대 번화가이다.

시위 목적은 행정장관 직선제. 홍콩의 행정수반인 행정장관을 시민들이 보통선거를 통해 직접 뽑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행정장관 직선제는 1997년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면서 중국이 내건 약속 중 하나였다. 그러나 중국은 2014년 8월 31일 행정장관 직선제를 하되 당국이 승인한 후보만 출마할 수 있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분노한 홍콩 시민들은 동맹 휴업, 길거리 연좌농성 등을 통해 출마 기회를 모두에게 열어야 한다고 요구했고, 그중 상징적으로 센트럴 도로를 79일간 점령하는 시위를 펼쳤다.

그러나 당국은 선거제 규정에 관한 논의는 없다며 물러서지 않았고 경찰이 최루액 스프레이와 최루탄 가스로 시위대 진압에 나서자, 시민들은 우산을 펼쳐 이에 대항했다.

수십만명이 참여해 민주화 확대를 요구했던 홍콩 우산혁명은 1천여명이 체포되며 미완의 혁명으로 끝이 났다.

우산혁명을 이끌었다가 투옥됐고 2021년 대만으로 도피한 정치학자 찬킨만은 25일(현지시간)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과 인터뷰에서 "2014년 우산혁명은 분수령이었다"며 "우리가 (도심) 점령이라는 소위 불법적 수단을 사용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시위 참가자들은 그에 따른 대가를 기꺼이 치를 용의가 있었다"고 말했다.그는 "그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대규모로 싸운 시민 저항운동이었다"며 어느 시점에서는 약 120만명의 시민이 참여했다고 덧붙였다.



◇ 5년 뒤 '범죄인 송환법' 반년간 반정부 시위…"우산혁명에 정치적 각성"

우산혁명은 무위로 돌아갔지만, 홍콩 시민들은 그로부터 5년 후 다시 들고 일어났다.

2019년 범죄인을 중국 본토로 보내 재판받게 하는 '범죄인 송환법'이 추진되자 우산혁명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거센 시위 물결에 홍콩 정부는 결국 범죄인 송환법안을 철회했지만, 시위는 오히려 민주화를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로 더욱 확대됐고 6개월 넘게 이어졌다.

경찰이 강경 진압에 나서면서 곳곳에서 시위대와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검은 옷을 입은 시민 수십만명은 매주말 집회를 하면서 홍콩 정부가 시위대를 강경 진압한 것에 사과하고 5년 전 우산혁명 때 내걸었던 행정장관 직선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재차 요구했다.

이에 대해 찬킨만은 "우산혁명의 최대 영향은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킨 것"이라며 우산혁명 실패로 그 다음에 벌어진 2019년 시위에서 사람들이 더욱 공격적으로 변한 것은 불가피했다고 짚었다.

그는 "젊은이들은 매우 불만족했고 참을성이 없었다. 그러나 홍콩인들을 점점 더 시민 불복종의 길로 몰아낸 것은 중국공산당의 권위적인 접근이었다"며 "모든 일은 중국공산당이 매번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저항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2019년 말까지 꺼질 줄 모르고 활활 타올랐던 이 반정부 시위는 2020년 1월 시작된 전대미문의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으로 속절없이 꺼져버렸다.

그 틈을 타 중국은 2020년 6월 홍콩국가보안법을 직접 제정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홍콩 선거제를 전면 개편함으로써 홍콩에서 반대파 목소리가 설 자리를 아예 지워버렸다.

현재 행정장관은 홍콩 740만 국민의 0.02%에 불과한 인원으로 구성된 선거위원회에서 간접선거로 뽑고 있다. 출마자도 당국이 자격심사를 통해 선정한다. 그 결과 2022년 5월 실시된 선거에서는 중국이 낙점한 단 한명의 후보가 출마해 94%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 범민주진영 '궤멸'…선거 무관심에 투표율 최저

중국은 홍콩국가보안법을 직접 제정해놓고도 이를 보완할 별도의 법을 홍콩 당국이 제정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결국 지난 3월 홍콩 정부는 속전속결로 홍콩판 국가보안법을 자체 제정해 중국이 제정한 국가보안법을 보완하는 죄목을 신설했다.

이미 중국이 만든 국가보안법으로 홍콩의 범민주진영이 궤멸했고, 주요 정치인과 사회활동가가 구속됐거나 해외로 도피했음에도 통제의 고삐를 더 죈 것이다.

중국이 "(친중) 애국자만 출마해야 한다"며 홍콩 선거제를 뜯어고쳐 민주 진영의 출마를 봉쇄하자 행정장관 직선제를 간절히 열망했던 홍콩 시민들은 모든 선거에 무관심으로 응답했다.

특히 작년 12월 치러진 제7회 홍콩 구의원 선거는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된 1997년 이후 치러진 모든 선거 중 가장 낮은 27.5%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2019년 11월 거센 반정부 시위 물결 속 진행된 제6회 구의원 선거의 투표율이 71.2%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던 것과 비교하면 무려 43.7%포인트(p)나 차이가 난다.

찬킨만은 "국가보안법 이후 공공연한 저항은 불가능해졌지만, 홍콩이 죽었는지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며 최근 선거들에서 투표율이 추락한 것은 여전히 많은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온건한 저항'을 하는 것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두 개의 국가보안법을 기반으로 빠르게 중국화가 이뤄지는 홍콩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는 쇠퇴하고 있으며 결국에는 '아시아의 진주'에서 중국의 작은 도시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달 초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는 "홍콩의 전반적인 사회정치적 시스템은 국가보안법 아래에서 재편됐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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