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美 뉴저지 한인사회의 '현실자각'

입력 2024-09-01 07:07
[특파원 시선] 美 뉴저지 한인사회의 '현실자각'



(뉴욕=연합뉴스) 이지헌 특파원 = '지역 정계 진출 등으로 한인 또는 아시아계의 지위가 높아졌다고 자부하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미국 동부 뉴저지주에서 조울증을 앓던 20대 한인 여성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한인 지역사회에 공분이 확산하고 있다.

경찰의 무분별한 과잉 대응도 문제지만 사건 발생 후 별다른 후속조치 없이 사태를 슬그머니 덮고 지나가려 하는 시 당국의 태도가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보니 교민들이 느끼는 답답함과 배신감은 더욱 컸다.

뉴저지주 포트리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는 이모(26)씨 가족은 지난 7월 28일(현지시간) 자정이 넘은 늦은 밤 이씨의 조울증 증세가 심해지자 이씨를 평소 진료받던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911에 전화해 구급차를 요청했다.

뉴저지주 검찰청이 최근 공개한 보디캠 영상을 보면 출동 경찰이 이씨 자택 현관문을 부수고 강제 진입을 시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정신건강 전문가가 현장에 함께 출동해 이씨를 설득하거나 경찰관이 직접 상황을 진정시키려는 시도는 없었다.

비극은 문이 강제로 열린 지 불과 몇 초 만에 순식간에 벌어졌다. 영상에는 총격 직후 "칼은 어딨어? 칼은 어딨어?"라고 반복해 외치는 경찰의 다급한 목소리가 담겼다. 제대로 된 상황 판단 없이 총격을 가한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대목이다.

주 검찰은 이씨가 칼을 손에 쥐고 있었는지는 언급하지 않은 채 "현장에서 칼이 수거됐다"라고만 발표했다. 피격 당시 이씨는 19ℓ짜리 대형 생수통을 들고 있었다.



이씨의 억울한 죽음이 알려지면서 뉴저지 일대 교민단체는 지난 7월 15일 추모집회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조속한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행사장에서 만난 한 50대 여성 교민은 "이런 일이 발생했는데도 멍하니 침묵하고 그냥 지나가선 안 된다. 한인사회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쌓인 게 많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마크 소콜리치 포트리 시장은 집회 현장을 방문해 유가족에 애도를 표했다. 다만, 주 검찰 차원의 조사 결과를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자고 말하면서 경찰 과잉 대응에 대한 사과나 징계 검토, 재발 방지 대책에 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지난 16일 보디캠 영상이 공개된 지 2주일 지난 뒤에도 시 당국의 태도에 별다른 변화가 없자 한인 커뮤니티 내에서는 답답함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주 검찰 조사가 통상 1년∼1년 6개월 소요되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여론의 관심이 멀어지고 결국 사건이 흐지부지 묻힌 채 지나가지 않겠느냐는 우려였다.

이에 지역 한인사회는 물론 아시아계 커뮤니티까지 나서 이번 일만큼은 그냥 지나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포트리를 포함한 뉴저지주 동북부 지역은 뉴욕시 퀸스와 더불어 미국 동부에서 한인 거주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꼽힌다.

뉴저지한인회와 KCC한인동포회관, 민권센터, 아시아·태평양계(AAPI) 뉴저지 등 한인단체 및 아시아 커뮤니티 단체는 오는 9월 5일 포트리 타운홀 앞에서 시 당국의 침묵을 규탄하는 항의 시위를 개최한다는 방침이다. 제대로 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대책 마련 등을 강하게 촉구하겠다는 것이다.

미국 사회에서 한인을 포함한 아시아계는 백인과 흑인·라틴계 사이에 낀 '중간자'라는 평가가 많다.

그러다 보니 정치·사회적으로 기여하는 것에 비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때론 정당한 요구조차 무시된 채 미국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인식이 많다.

한 교민 활동가는 "포트리는 한인의 이민 역사가 길고 한인 인구도 많다"며 "한인사회의 위상이 큰 지역임에도 시 당국이 진실을 외면하고 사안을 덮으려 하는 모습을 보면서 위기 의식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이 교민사회에 일종의 현실 자각의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다른 교민단체 관계자는 "이번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인종 편견이나 한인에 대한 차별 탓이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그러나 이번 사건을 그냥 넘길 경우 한인이나 아시아계를 계속 만만하게 볼 것이라고 우려하는 시각들이 많다"라고 전했다.

p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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